본문 바로가기

좋은글323

문밖에 서 있는 자를 위하여 문득 길거리에서 나에게로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때가 있다. 12월.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종종걸음을 치고 길가에도 시장에도 지하도에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아진 사람들의 떼가 이리저리 밀려가고 흘러간다. "대체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나는 때때로 그런 것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흔적없이 스며들고 들끓던 거리가 비고 두려운 적막이 깔리게 된다. 다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내내 고독하여..."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읊어본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그가 말한 '집'은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단순한 육신의 은신처, 외계로부터 분리된 육면체의 공간을 .. 2014. 12. 14.
감나무 아래서의 참회 어두운 밤길 달려 고향에 온 섣달 그믐밤이었지요 오래 참고 왔던 요의尿意를 풀기 위해 뒤란의 늙은 감나무 아래서 부끄럼도 없이 아랫도리를 내놓았는데요. 오랜 그리움으로 오촉 전구알 같은 홍시 하나 달고 하늬바람 속에 서 있던 감나무가 흠칫, 잔가지들을 바르르 떨더라고요. 일순 감꽃처럼 눈부시게 머리 위로 쏟아지는 요요耀耀한 별빛들이라니! 불현듯 감나무에게 죄송 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랫도리 부르르 떨렸지요. 새 집을 지으면서 어머니가 함께 심은 성주 같은 감나무인데 고작 지린내 나는 오줌발이나 갈기다니, 에끼 호로 자석 같으니라고! 누군가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것만 같아 얼른 아랫도리를 추스르고 돌아서는데, 글쎄, 정지문 열고 선 칠순 노모께서 ‘아야, 거기서 뭐 하냐’하시는데, 그냥 ‘별빛이 하도 좋아.. 2014. 10. 9.
이 가을에는..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사랑" 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 2014. 9. 23.
혼자라도 괜찮다 언제나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의 병리적 상태며 그 상태로 누구와 결혼한다면 흡혈귀가 피를 원하듯 연인을 독식하려는 의처증, 의부증으로 상대의 피를 말리게 될 것이다. 홀로 설 수 없으면서 결혼을 하면 계속 사랑만 해달라고 조르게 되어 두 사람이 다시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홀로서기의 지혜와 고독의 이익은 인류 역사에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 위인 중 많은 수가 동의한다. 타인의 사랑과 관심과 친밀감이 필요한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고독이 필요하다. 고독 속에서만이 창조성이 샘솟고 미스터리가 해결되며 슬픔도 극복될 수 있는 법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침묵과 그 속에.. 2014. 7. 15.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 어떤 사람이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는 흙을 가져다 붓고 자신이 좋아하는 온갖 아름다운 씨앗들을 심었다. 그런데 얼마 후 정원에는 그가 좋아하는 꽃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들레가 피어났다. 민들레는 아무리 뽑아도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 또 피어났다. 민들레를 없애기 위해 모든 방법을 써 봤지만 그는 결국 성공할 수 없었다. 노란 민들레는 다시 또다시 피어났다. 마침내 그는 정원 가꾸기 협회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내 정원에서 민들레를 없앨 수 있을까요. 정원 가꾸기 협회에서는 그에게 민들레를 제거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방법들은 이미 그가 다 시도해 본 것들이었다. 그러자 정원 가꾸기 협회에서는 그에게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을 일러 주었다. 그것은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2014. 5. 21.
사막에 가고싶은 이유 사막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 같았다. 내 안에 있는 사막도 함께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늙어 가는 것과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안의 사막 언저리에서는 어느덧 인간이 더 이상 거주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예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내면의 황폐화에 대한두려움도 생겼다. 사막은 소멸을 미리 조금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라는 고향으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 사막에서라면 우리는 존재하는 동시에 완전히 여분으로 남는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삶에 짐이 되었던 수많은 일들이 아주 멀리 떨어져있고, 우리로부터 벗어나 있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날 찾거나 필요로 하거나 바라보는 .. 2013. 10. 22.
가을까지 온 것들.. 구절초 꽃의 보랏빛 향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잠자리가 대추나무 가지로 옮겨 앉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로 나뭇가지를 잡으며 대추나무에게 미세한 잎맥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네 개의 날개 끝에 있는 단아한 고동색 무늬가 곱습니다. 잠자리 몸의 아름다운 색깔들은 누가 칠해놓았는지 참 잘도 그리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작은 한 마리의 잠자리도 기나긴 장맛비의 회초리를 다 견뎌냈습니다. 뜨거운 햇살의 시간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귀뚜라미 몇 마리가 언제 숨어들어 왔는지 욕실 구석에 살림을 차린 뒤 몰래 새끼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가늘고 긴 더듬이를 뻗어 소리를 내 보낼 방향을 가늠하더니 저녁이면 숲으로 긴 편지를 찍어 보내느라 골똘합니다. 귀뚜라미 가족도 천둥과 번개의 시절을 다 지나왔습니다. 그.. 2013. 10. 1.
산에 오를 때는 깨끗하고 싶다 산행을 가기 전날 저녁에는 손톱과 발톱을 깎는다. 두꺼운 장갑과 등산용 양말로 보호하긴 하지만 손발톱이 말끔하지 않으면 자칫 꺾이거나 부러지는 부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뜨거운 물로 샤워한다. 어쨌거나 산 앞에 섰을 때는 깨끗하고 싶다. 조금은 착하고 순진하고 싶다. - 김별아의《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중에서 - 사실 어린 시절의 난, 산을 오르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산을 너무나 좋아하셔서 전국의 명산은 물론, 해외에서도 그곳에 있는 산을 정복해야만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셨던 아버지를 둔 탓에 우리 가족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언제 어디서든 산을 오르곤 했다. 아예 여행지를 산이 있는 곳 혹은 산이 가까운 곳으로 정해야 하기도 했으니까. 어린 시절의 난, 귀찮.. 2013. 8. 5.
내 삶에 따스한 위안을 주는 그대에게 하나. 당신은 일 년에 몇 통의 편지를 보내는지요? 그리고 자신이 받아 보는 편지는 몇 통쯤 되는지요? 그립고 보고 싶던 사람으로부터 어느 날 날아온 한 장의 편지로 인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듯 어쩔 줄 몰라 하던 날은 없었는지요? ' 이 세상 누구보다도 소중한 그대'라고 쓰여진 편지 말입니다. 거창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그저 안부만 물었을 뿐인 편지를 받고도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방의 따스한 마음이 거기에 묻어나서일 겁니다. 둘. 돌이켜보면, 쓸쓸하거나 외로울 때 우리는 편지를 많이 쓰게 됩니다. 멀리 뚝 떨어져 있어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즐겁고 기쁜 일을 접했을 때보다 힘겹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는 '편지'라.. 2013.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