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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323

낙타의 꿈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 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그가 거느리던 나라의 경계는 사방의 지평선이므로 그를 싣고 걸어가는 모래 언덕은 언제나 처음이었다 모래의 지붕에서 만나는 무수한 아침과 저녁을 건너는 그 다음의 아침과 태양, 애초에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할 만큼의 물이었으므로 나는 늘 .. 2016. 5. 26.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나에게 길을 가르친 건 외로움이다. 길 위에 있는 동안, 나는 가장 깊고 온전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건 가던 길을 멈추면, 그 순간부터 다시 길을 나설 궁리를 한다. 그래서 나는 도로 휴게소에서도 오래 휴식하지 못한다. 달리는 동안 나는 나를 망각한다. 어떤 상태, 다시 말해 하나의 기류가 되어가는 나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를 사로잡고 옥죄는 현실과 일상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은 그때에만 나타난다. 하지만 달리는 동안, 생각은 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고, 시공을 관통하며 모든 정신적인 군더더기와 사유의 잔여물이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풍경처럼 스러지는 걸 느낀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럴 때 생각이 아주 명료해진다. 그리하여 나는 끝없이 떠나고 되돌아온다.. 2016. 3. 7.
초등학교의 황혼 그 키 큰 느티나무가 왜 이렇게 작아졌을까 발돋움하여도 발돋움하여도 손 닿지 않던 수양버드나무 가지에 하루 해가 걸려 놀로 지는 지붕이 아름답던 그때 숨차게 달려도 먼산처럼 닿을 수 없었던 운동장 그 끝에 서 있던 백양나무는 둥치만 남고 우리가 깔매놀이를 하던 플라타너스 밑에 우뚝 서 있던 그 바위는 삭아 흙이 된 지금 우리가 차던 재기, 우리가 받고 놀던 공깃돌도 먼지가 된 지금, 황혼녘의 지붕은 담요처럼 포근하고 잔광에 반짝이는 기왓장들만 숨쉬는 목숨이 되어 이 적막과 저 적막을 불러와 산 뒤에 앉힌다 누구의 소년이든 한번은 이 황혼에 발 묻었을 것이다 누구든 한번은 이 황혼이 제 추억의 이불이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수천의 잎새 뒤로 저녁별이 돋을 때 제 가슴의 슬픔을 세수시키고 누구든 그 반짝이는 .. 2015. 12. 15.
사람 사는 세상 송호리(충북 영동)의 가을 세월이 흐른다는 말은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바뀌고, 옛날의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시간도 흐르고 사람도 흐른다. 사람들은 물살에 밀리듯이 시간에 밀린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기대로 가슴이 설레었다. 짝이 바뀌고 담임선생님이 바뀐다는 사실이 우리를 흥분케 했다. 골목에서 흙장난하던 소꼽친구와 사춘기 때 고민을 털어놓던 친구가 달랐고, 함께 손을 잡고 밤벚꽃놀이를 즐기던 친구가 달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새로운 시간을 만나는 일은 곧 새로운 얼굴과 만나는 일이었다. 취직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일과 함께 새로운 얼굴을 대면하는 일이고 결혼을 한.. 2015. 10. 24.
시골 중국집 나주 다시면의 일성루 지나가다 허기를 자장면 냄새한테 그대로 들켜버린 건 시골 중국집 앞에서였다 우리 일행은 목단인 듯 작약인 듯 사방연속 꽃무늬 벽지로 도배한 내실로 들어갔다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주인은 혼자서 오차도 따르고 주문도 받고 단무지도 양파도 내왔는데, 그릇에 그득히 담겨온 뜨끈한 자장면을 허겁지겁 먹다가 나는 어쩌다가 자개장롱 위에 일렬횡대로 도열해 있는 술병들을 보게 되었다 인삼주 다래주 더덕주에다 그 밖에 이름도 모를 열매로 담근 술이 예닐곱 술병마다 가득하였는데, 그 우러날 대로 우러난 슬픔 같은 게 발그스레할 대로 발그스레해 진 것을 보면서 나는 문득 싸하게 목이 메어왔는데, 그 까닭은 장롱 맞은편 벽에 넥타이를 매고 벌써 다른 데로 가기에는 누가 봐도 좀 이르다 싶게 안쓰러.. 2015. 8. 28.
그 여름밤 어쨌거나 그 시절 그렇게도 열심히 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는데 나는 한번도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어 오랜 시간이 지나서, 한번인가 두번인가 나는 별똥별을 본 적이 있어 그런데 그때는 또 너무나 순식간이어서, 아무런 소원도 빌지 못했지 소원을 빌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기다릴 땐 떨어지지도 않더니 어째서 아무 생각도 없는 텅빈 눈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별은 떨어지는 것일까, 나는 그게 너무 아팠어, 이유도 없이 물론 빌어야 할 소원 같은건 없었어 소원 같은 건 어른이 되면서 모두 버렸어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 그건 너무 깊은 상실을 가져다 준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던 것들을 언제나 나를 스쳐 지나가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어젯밤 나는 문득 별이 떨어지기를 기.. 2015. 6. 10.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 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 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은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 2015. 6. 3.
인생찬가 슬픈 목소리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갖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니 만물은 외형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참된 것, 인생은 진실한 것 무덤이 그 종말이 될 수는 없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가야할 길은 향락도 아니며 슬픔 또한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빨리 간다 우리의 심장은 튼튼하고 용감하나 싸맨 북소리처럼 둔탁하게 무덤을 향한 장송곡을 치고 있느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정에서 말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서 이기는 영웅이 되어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는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그대로 묻어버려라 .. 2015. 2. 8.
문밖에 서 있는 자를 위하여 문득 길거리에서 나에게로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때가 있다. 12월.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종종걸음을 치고 길가에도 시장에도 지하도에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아진 사람들의 떼가 이리저리 밀려가고 흘러간다. "대체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나는 때때로 그런 것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흔적없이 스며들고 들끓던 거리가 비고 두려운 적막이 깔리게 된다. 다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내내 고독하여..."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읊어본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그가 말한 '집'은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단순한 육신의 은신처, 외계로부터 분리된 육면체의 공간을 .. 2014.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