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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노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가을에는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고 그 맑은 마음결에 오직 한사람의 이름을 떠보낸다 주여! 라고 하지 않아도 가을엔 생각이 깊어진다 한 마리의 벌레울음소리에 세상의 모든 귀가 열리고 잊혀 진 일들은 한 잎 낙엽에 더 깊이 잊혀진다 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 경험의 문을 두드리면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거라 말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산자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사자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 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이란 말 속에 있다 김 대규 2022. 10. 15.
다시, 가을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을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도종환 Shubert Ständchen (serenade) - Fritz Wunderlich 2022. 9. 27.
9월도 저녁이면..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 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강연호 2022. 9. 3.
그런 집 한 채 있으면 좋겠네 낮은 쪽담 둘러 백목련 자목련 서너 그루쯤 품고 있고 그 아래 백합과 수국이 촘촘하고 마당 제일 깊숙한 곳에 국화가 몇 이랑 빼곡이 심어져 있는 집 뒤꼍에 나가면 열 뼘 채마밭 상추랑 쑥갓이랑 배추랑 심어 놓고 호박이랑 풋고추랑 실파랑 심어 놓고 배부른 장독에서 된장 퍼지게 담아 낡은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이고 모락모락 김 오른 보리밥 한 사발에 등나무 넝쿨진 평상에 앉아 한 잔 반주 청하면 설운 님 사연이 한 잔이요 설운 내 사연이 한 잔이요 주워들은 남 사연도 설운 한 잔이라 넓은 흙마당 해는 뒷걸음질쳐 사라지고 무정한 바람에 꽃도 잎도 지고 잡을 수 없는 내 청춘 권주가도 서글퍼 취한 몸 뉘이면 아질한 흙내가 젖은 눈 감겨주고 떠나간 얼굴들 별 되어 나를 보고 있으리 속절없이 하얀 눈 쏟아지는 겨울날.. 2022. 8. 22.
인생을 다시 산다면.. 큰 산자락 아래로 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토담집 안 뜨락에는 사철 꽃이 연잇는 흙내 나는 곳에 태어나리라 장독대 뒤뜰의 봉숭아 꽃물 들이는 첫사랑 순이와 볼그레한 미래의 꿈들에 관해 얘기하리라 꽃을 담는 눈빛으로 연인에게 자상할 것이며 그의 동선이 편안해지도록 주변을 살필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다정한 눈높이로 대할 것이고 아프지 않게 보호하며 미래의 꿈과 행복에 대해 논할 것이다 긴장을 풀고 몸은 부드럽게 하리라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산에도 더 자주 갈 것이며 오래된 벗들과 담소도 즐기리라 가난한 삶에 대해서는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며 석양 노을 곱게 물들어가듯이 평화롭게 자유롭게 노후를 보낼 것이다. 김재진 Orla Fallon - Down By Sally Gardens 2022. 6. 21.
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 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 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도종환 2022. 4. 12.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2022. 3. 10.
해남길, 저녁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두운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놀빛 물려놓는 남녘의 바다는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갖 소리를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아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먹빛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 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머리가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것이 이 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보는데 실루엣을 단단하게.. 2022. 2. 25.
동백꽃 편지 내고향 남쪽바닷가 바람모퉁이 숲에서 툭하고 동백꽃이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꽃송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철없던 시절 사랑같기도 하고 홀로 떠돌아 흐르던 추억 같기도하고 무심코 발견한 지난날의 연서 같기도 합니다 시나브로 봄은 오는데 꽃은 떨어져 쌓이고 선홍색 슬픔을 뒤척이며 세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대는 지금 어느바다위를 헤메이는 가여운 넋이되어 있습니까 바라보면 길위에는 초사흘 달빛이 흐르고 은빛 물보라를 일으키는 수평선너머 까마득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바다에는 못다한 사랑처럼 동백꽃이 지고 있습니다 외마디 비명처럼 등뒤에서 툭하고 떨어집니다 이승에서 짧은 생애를 샘물처럼 고이는 슬픔만 남기고 그대는 지금 어느길섶에 앉아서 여위어 가는지요 바다에는 온전히 떨어져 누운 붉은 꽃송아리뿐 그대를 기다리는 일이 피었.. 2022.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