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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편 서해 바닷가 채석강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채석강 암벽이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옳다 누군가 눈이 참 밝구나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사내의 등을 기댄 그니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그리고 그것을 새길 만한 가치가 있다면 사랑했다는 것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지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복효근 2021. 5. 22.
옛 노트에서.. 그 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2021. 5. 14.
봄의 노래 나 그대에게 한 송이 매화꽃이고 싶었네 이른 봄, 돌담 가에 피는 노란 산수유 꽃이고 싶었네 나 그대에게 한 줄기 바람이고 싶었네 산골짝을 흐르는 시냇물에 부서지는 햇살이고 싶었네 토담 밑에 피어나던 수선화 같던 누이여 지난 날 우리가 품었던 슬픈 여정을 기억하겠는가 꽃처럼 눈부시게 피었다가 사라져 간 날들 해마다 찾아오는 봄처럼 영원할 줄 알았지만 사라져 간 세월의 흔적만이 영원할 뿐 이제, 흘러간 강물을 바라보는 일처럼 추억의 그림자를 이끌고 길 위에 서 있노니 지난 모든 봄들이 내 곁을 스쳐가듯이 홀로 선 들길에 매화꽃 향기 가득하구나 돌아올 그 무엇이 있어 가는 봄을 그리워하리오만은 바람 부는 저 산하, 옷고름 같은 논길을 따라 가슴에 번지는 연분홍 봄날의 향기를 따라 마음은 먼 하늘가를 떠돌아 .. 2021. 3. 16.
夢山浦 日記 그대와 함께 걷는 길이 꿈길 아닌 곳 어디 있으랴만 해질 무렵 몽산포 솔숲 길은 아무래도 지상의 길이 아닌 듯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참으로 아득한 꿈길 같았습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 좋았던 나는 순간순간 말을 걸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 속마음 서로가 모르지 않기에 그래, 아무 말 말자 약속도 확신도 줄 수 없는 거품뿐인 말로 공허한 웃음짓지 말자 솔숲 길을 지나 해변으로 나가는 동안 석양은 지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운 낙조를 보며 그대는 살며시 내게 어깨를 기대 왔지요 함께 저 아름다운 노을의 세계로 갈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가 그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대는 그저 쓸쓸한 웃음만 보여 줬지요. 아름답다는 것, 그것이.. 2021. 2. 16.
섬진강 매화를 보셨는지요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를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김용택 내가 부를 너의 이름 - 김영태 2021. 2. 12.
축복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 보니 축복이었다 그 절망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 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 있는 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2021. 2. 6.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해빙기의 아침은 춥다. 잔디 위에서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는 한낮에 것, 아침은 춥고 때로 창마다 성에가 끼기도 한다. 우리는 알아야 하리라. 봄은 따뜻하게만 오는 것이 아님을 강이 풀리고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죽음의 시간을 적시며 비가 내.. 2021. 2. 2.
그대와 함께.. 무지개가 다리를 놓는 그곳 그대와 함께 어느 무인도 외딴섬으로 가게 해다오 ​ 그곳에 밭을 일구고 푸른 잎 사이로 상긋한 봄이 오면 보리밭 이랑마다 아지랑이 피고 여름이면 자주색 감자꽃 거기 부서진 자유를 모아 물새들 목청껏 노래하는 그런 섬으로 가게 해다오 ​ 가을이면 하얀 꽃잎 머리에 이고 겨울이면 한지창에 스미는 따사로운 햇살 ​ 아침이면 물새의 지저귐으로 창이 밝고 저녁이면 호롱불 아래 그대 기타 소리로 잠들고 싶어 ​ 그렇게 우리의 소망 연초록 잎새이게 해다오 ​ 문명의 화려한 옷 없어도 지천에 흩어진 자유만으로 은총의 빛살 가르며 그대와 함께 조용히 나이 들어가는 그냥 한 알의 홀씨로 살게 해다오 김인자 Georges Moustaki - Joseph 2021. 1. 30.
모항으로 가는 길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 밥 먹다가 석삼년만에 제집에 드나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에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 왔듯이 구.. 2021.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