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842

해남길, 저녁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두운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놀빛 물려놓는 남녘의 바다는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갖 소리를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아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먹빛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 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머리가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것이 이 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보는데 실루엣을 단단하게.. 2022. 2. 25.
동백꽃 편지 내고향 남쪽바닷가 바람모퉁이 숲에서 툭하고 동백꽃이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꽃송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철없던 시절 사랑같기도 하고 홀로 떠돌아 흐르던 추억 같기도하고 무심코 발견한 지난날의 연서 같기도 합니다 시나브로 봄은 오는데 꽃은 떨어져 쌓이고 선홍색 슬픔을 뒤척이며 세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대는 지금 어느바다위를 헤메이는 가여운 넋이되어 있습니까 바라보면 길위에는 초사흘 달빛이 흐르고 은빛 물보라를 일으키는 수평선너머 까마득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바다에는 못다한 사랑처럼 동백꽃이 지고 있습니다 외마디 비명처럼 등뒤에서 툭하고 떨어집니다 이승에서 짧은 생애를 샘물처럼 고이는 슬픔만 남기고 그대는 지금 어느길섶에 앉아서 여위어 가는지요 바다에는 온전히 떨어져 누운 붉은 꽃송아리뿐 그대를 기다리는 일이 피었.. 2022. 2. 9.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 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2021. 12. 17.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파른 현실을 올라가면 그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의 숨결과 그림자와 눈물을 사랑한다 눈 날리는 하늘가에서 아이들이 방방 뛰놀듯이 나는 그사람의 마당과 지붕과 하늘을 거닐고 있다 메마른 골목을 쭈욱 따라가면 그곳에서 따뜻한 밥을 지어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의 반찬과 밥을 숟가락질 한다 어둠이 내려와 서성거리는 하늘밑 집, 그 집 방의 이불 속에 내 귀와 마음을 숨기고 그 사람에게 내 첫정을 아뢰고 싶다 눈 내린 가파른 현실을 올라가다 미끄러지고, 엎어져 첫눈을 원망도 했다 그러나 첫눈에 많은 설레임을 앓으며 가끔 냉대한 길가에 주저앉고 싶기도 하고 미끄럼 타고 세상 저 밑으로 가고 싶기도 했지만 하늘밑 그 집에서 잠 자는 그 사람이 그리웠다 나는 그 사람의 새하얀 눈물.. 2021. 11. 8.
귀로 돌아오는 길은 늘 혼자였다 가는 겨울해가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내 마음도 무너져왔고, 소주 한 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버스를 타는 동안에 차창 밖엔 소리없이 눈이 내렸다 그대를 향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둔다는 것, 그것은 정말 소주병을 주머니에 넣듯 어딘가에 쉽게 넣어 둘 일은 못 되었지만 나는 멍하니 차창에 어지러이 부딪쳐오는 눈발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2021. 11. 7.
강물을 따라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흐르는거야 너도 나처럼 흘러봐 하얗게 피어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 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 봐 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보라색 구절초 곁을 지날 때 구절초꽃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한번 피었다가 지는 꽃이야 너도 나처럼 이렇게 꽃 피어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지날 때 느티나무는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사는 거야 너도 나무처럼 뿌리를 내려 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아래를 지날 때 구름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별 게 아니야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거야 너도 정처없이 떠돌아 봐 내 평생 산 곁을 지나다녔네 산은 말이 없네 한마디 말이 없네 김용택 Marianne Faithful.. 2021. 11. 7.
자작나무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도종환 Blåmann (Lost Sheep) - Sigmund Groven 2021. 11. 4.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서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어느 꽃나무 아래 앉아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풀잎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꽃이 시들고 있다 이미 무슨 꽃인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서도 너는 있다 빈 하늘을 볼 때마다 너는 떠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서 있다 훌쩍 서 있다 나는 저 마당보다도 가난하고 가난보다도 가난하다 나는 저 마당가의 울타리보다도 가난하고 울타리보다도 훌쩍 가난하다 - 가난은 참으로 부지런하기도 하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고 너는 훌쩍 없고 없고 그러나 내 곁에는 언제나 훌쩍 없는 사람이 팔짱을 끼고 있다 -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뿐인 심장을 만진다 장석남 Frédéric Burgmueller-Nocturne-.. 2021. 10. 28.
그 옛날의 사랑이여 지붕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햇살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래로 길고 긴 세월을 땅속에 살다가 우화되어 하늘로 나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송편이 솔잎 내음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 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욱도 배추 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란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오디빛 참빛도 어머니가 퍼주던 보리쌀 한 되 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툇마루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발라가며 쓴 단기 4287년 어느날의 일기도 마분지 공책에 .. 2021.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