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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돌아오는 길은 늘 혼자였다 가는 겨울해가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내 마음도 무너져왔고, 소주 한 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버스를 타는 동안에 차창 밖엔 소리없이 눈이 내렸다 그대를 향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둔다는 것, 그것은 정말 소주병을 주머니에 넣듯 어딘가에 쉽게 넣어 둘 일은 못 되었지만 나는 멍하니 차창에 어지러이 부딪쳐오는 눈발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2021. 11. 7.
강물을 따라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흐르는거야 너도 나처럼 흘러봐 하얗게 피어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 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 봐 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보라색 구절초 곁을 지날 때 구절초꽃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한번 피었다가 지는 꽃이야 너도 나처럼 이렇게 꽃 피어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지날 때 느티나무는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사는 거야 너도 나무처럼 뿌리를 내려 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아래를 지날 때 구름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별 게 아니야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거야 너도 정처없이 떠돌아 봐 내 평생 산 곁을 지나다녔네 산은 말이 없네 한마디 말이 없네 김용택 Marianne Faithful.. 2021. 11. 7.
자작나무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도종환 Blåmann (Lost Sheep) - Sigmund Groven 2021. 11. 4.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서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어느 꽃나무 아래 앉아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풀잎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꽃이 시들고 있다 이미 무슨 꽃인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서도 너는 있다 빈 하늘을 볼 때마다 너는 떠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서 있다 훌쩍 서 있다 나는 저 마당보다도 가난하고 가난보다도 가난하다 나는 저 마당가의 울타리보다도 가난하고 울타리보다도 훌쩍 가난하다 - 가난은 참으로 부지런하기도 하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고 너는 훌쩍 없고 없고 그러나 내 곁에는 언제나 훌쩍 없는 사람이 팔짱을 끼고 있다 -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뿐인 심장을 만진다 장석남 Frédéric Burgmueller-Nocturne-.. 2021. 10. 28.
그 옛날의 사랑이여 지붕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햇살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래로 길고 긴 세월을 땅속에 살다가 우화되어 하늘로 나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송편이 솔잎 내음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 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욱도 배추 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란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오디빛 참빛도 어머니가 퍼주던 보리쌀 한 되 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툇마루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발라가며 쓴 단기 4287년 어느날의 일기도 마분지 공책에 .. 2021. 10. 16.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서편제 Ost 천년학 - 김수철 2021. 8. 13.
사랑에게.. 언덕의 미류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김석규 ♬ Rod McKuen - Jean 2021. 7. 26.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이십 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 대에는 마흔이 무서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박우현 Carpe Diem ! ♬ Late Night Serenade - Tol & Tol 2021. 6. 21.
靑山行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으로 피어오르고 생목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이기철 ♬ 산행 - 김영동 2021.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