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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매화를 보셨는지요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를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김용택 내가 부를 너의 이름 - 김영태 2021. 2. 12.
축복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 보니 축복이었다 그 절망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 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 있는 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2021. 2. 6.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해빙기의 아침은 춥다. 잔디 위에서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는 한낮에 것, 아침은 춥고 때로 창마다 성에가 끼기도 한다. 우리는 알아야 하리라. 봄은 따뜻하게만 오는 것이 아님을 강이 풀리고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죽음의 시간을 적시며 비가 내.. 2021. 2. 2.
그대와 함께.. 무지개가 다리를 놓는 그곳 그대와 함께 어느 무인도 외딴섬으로 가게 해다오 ​ 그곳에 밭을 일구고 푸른 잎 사이로 상긋한 봄이 오면 보리밭 이랑마다 아지랑이 피고 여름이면 자주색 감자꽃 거기 부서진 자유를 모아 물새들 목청껏 노래하는 그런 섬으로 가게 해다오 ​ 가을이면 하얀 꽃잎 머리에 이고 겨울이면 한지창에 스미는 따사로운 햇살 ​ 아침이면 물새의 지저귐으로 창이 밝고 저녁이면 호롱불 아래 그대 기타 소리로 잠들고 싶어 ​ 그렇게 우리의 소망 연초록 잎새이게 해다오 ​ 문명의 화려한 옷 없어도 지천에 흩어진 자유만으로 은총의 빛살 가르며 그대와 함께 조용히 나이 들어가는 그냥 한 알의 홀씨로 살게 해다오 김인자 Georges Moustaki - Joseph 2021. 1. 30.
모항으로 가는 길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 밥 먹다가 석삼년만에 제집에 드나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에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 왔듯이 구.. 2021. 1. 27.
아름다운 길 너는 내게 아름다운 길로 가자 했다 ​ 너와 함께 간 길에 꽃이 피고 단풍 들고 ​길을 따라 영롱한 음표를 던지며 개울물이 흘렀지만 ​겨울이 되자 그 길도 걸음을 뗄 수 없는 빙판으로 변했다 ​너는 내게 끝없이 넓은 벌판을 보여달라 했다 ​네 손을 잡고 찾아간 들에는 온갖 풀들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 몸 구석구석은 푸른 물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빗줄기가 몰아치자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 ​ 내 팔을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 내가 넘어질 때 너도 따라 쓰러졌고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세찬 바람 불어올 때마다 ​너도 그 바람에 꼼짝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 ​밤새 눈이 내리고 날이 밝아도 ​ 눈보라 그치지 않는 아침 ​너와 함께 눈 쌓인 언덕을 오른다 ​빙판 없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 ​사랑하며.. 2021. 1. 22.
生의 온기 더러는 아픈 일이겠지만 가진 것 없이 한겨울 지낸다는 것 그 얼마나 당당한 일인가 스스로를 버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몰아치는 눈발 속에서 눈 씻고 일어서는 빈 벌판을 보아라 참한 풀잎들 말라 꺾이고 홀로의 목마름 속 뿌리로 몰린 생의 온기, 함박눈 쌓이며 묻혀 가는 겨울잠이여 내가 너에게 건넬 수 있는 약속도 거짓일 수밖에 없는 오늘 우리 두 손을 눈 속에 파묻고 몇 줌 눈이야 체온으로 녹이겠지만 땅에 박힌 겨울 칼날이야 녹슬게 할 수 있겠는가 온 벌판 뒤덮고 빛나는 눈발이 가진 건 오직 한줌 물일 뿐이리 그러나, 보아라 땅 밑 어둠 씻어 내리는 물소리에 젖어 그 안에서 풀뿌리들이 굵어짐을 잠시 서릿발 아래 버티며 끝끝내 일어설 힘 모아 누웠거늘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당당한 일인.. 2021. 1. 16.
겨울나무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 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도 종환 ♬ Chopin Waltz Op.69 No.2 (Dalia Lazar) 2020. 12. 13.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으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 2020.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