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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으로 가는 길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 밥 먹다가 석삼년만에 제집에 드나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에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 왔듯이 구.. 2021. 1. 27.
아름다운 길 너는 내게 아름다운 길로 가자 했다 ​ 너와 함께 간 길에 꽃이 피고 단풍 들고 ​길을 따라 영롱한 음표를 던지며 개울물이 흘렀지만 ​겨울이 되자 그 길도 걸음을 뗄 수 없는 빙판으로 변했다 ​너는 내게 끝없이 넓은 벌판을 보여달라 했다 ​네 손을 잡고 찾아간 들에는 온갖 풀들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 몸 구석구석은 푸른 물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빗줄기가 몰아치자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 ​ 내 팔을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 내가 넘어질 때 너도 따라 쓰러졌고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세찬 바람 불어올 때마다 ​너도 그 바람에 꼼짝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 ​밤새 눈이 내리고 날이 밝아도 ​ 눈보라 그치지 않는 아침 ​너와 함께 눈 쌓인 언덕을 오른다 ​빙판 없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 ​사랑하며.. 2021. 1. 22.
生의 온기 더러는 아픈 일이겠지만 가진 것 없이 한겨울 지낸다는 것 그 얼마나 당당한 일인가 스스로를 버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몰아치는 눈발 속에서 눈 씻고 일어서는 빈 벌판을 보아라 참한 풀잎들 말라 꺾이고 홀로의 목마름 속 뿌리로 몰린 생의 온기, 함박눈 쌓이며 묻혀 가는 겨울잠이여 내가 너에게 건넬 수 있는 약속도 거짓일 수밖에 없는 오늘 우리 두 손을 눈 속에 파묻고 몇 줌 눈이야 체온으로 녹이겠지만 땅에 박힌 겨울 칼날이야 녹슬게 할 수 있겠는가 온 벌판 뒤덮고 빛나는 눈발이 가진 건 오직 한줌 물일 뿐이리 그러나, 보아라 땅 밑 어둠 씻어 내리는 물소리에 젖어 그 안에서 풀뿌리들이 굵어짐을 잠시 서릿발 아래 버티며 끝끝내 일어설 힘 모아 누웠거늘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당당한 일인.. 2021. 1. 16.
겨울나무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 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도 종환 ♬ Chopin Waltz Op.69 No.2 (Dalia Lazar) 2020. 12. 13.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으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 2020. 12. 11.
눈 오는 밤엔 연필로 시를 쓴다 눈 오는 밤에는 이 세상 가장 슬픈 시를 읽고 싶다 슬픔이 아름다워 차마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시집을 헌책방에 가서 오백 원 주고 사 온 옛날 시집을 다시 꺼내 읽고 싶다 종이 썩는 냄새가 조금은 코에 거슬리지만 그것이 추억의 냄새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즐겁고 떨어져 나간 책 귀퉁이의 구절이 새록새록 상상 움을 내미는 책상을 정리하다 나온 흑백 사진 같은 시집을 눈 오는 밤엔 내가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이 되어 읽고 싶다 전화도 티브이도 없는 곳이면 더 좋겠다 캄캄함이 하얗게 빛나는 외진 곳으로 먼 나라 사람 지바고처럼 털모자를 눌러 쓰고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펑펑 눈 오는 밤에는 잊혔던 호롱불 심지를 올리고 불빛이 흐려 글자가 잘 안 보이는 작은 방에서 지금은 죽은 작가가 쓴 이별이 아름다운 소설.. 2020. 12. 10.
마스크와 보낸 한철 살다 살다 그깟 마스크를 사려고 약국 앞에 줄을 설 줄이야 그래도 고맙다 신통한 부적처럼 우환을 막아 줘서 고맙고 속이 다 내비치는 안면을 가려 줘서 고맙고 세수를 안 해도 사람들이 모르니까 더 고맙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육이오 동란까지 겪고 또 겪고 살다 살다 마스크 대란이 올 줄이야 저들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벌레군단 국경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 인류 침공에 어벤저스 슈퍼 히어로들도 속수무책인데 귓바퀴가 없으면 걸 데도 없는 저 손바닥만 한 천 조각들이 지구를 구할 줄이야 모든 화는 입으로 들어온다기에 쓸데없는 말 안 하고 나를 아끼고 남을 존중하며 마스크와 한철 보내고 나니까 아무래도 내가 좀 커진 것 같다 나라도 이전의 나라는 아닌 것 같다 이상국 제목에서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철.. 2020. 11. 25.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저렇게 푸른 잎들이 날빛을 짜는 동안은 우리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저녁이면 수정 이슬이 세상을 적시고 밤이면 유리 별들이 하늘을 반짝이고 있는 동안은 내 아는 사람들 가까운 곳에서 펄럭이는 하루를 씻어 널어놓고 아직 내 만나지 못한 사람들 먼 곳에서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꿈을 엮고 있는 동안은 바람이 먼 곳에서 불어와 머리카락을 만지고 햇빛이 순금의 깁으로 들판을 어루만지는 동안은 우리들 삶의 근심이 결코 세상의 저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밤새 꾸던 꿈 하늘에 닿지 못하면 어떠랴 하루의 계단을 쌓으며 일생이라는 건축을 쌓아 올리는 사람들 우리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그 아름답고 견고한 마음들 눈감아도 보이는 동안은 그들 숨소리 내일을 여는 빗장 소리로 귓가에 들리는 동안은 이기철 ♬ Ralf E. Bar.. 2020. 11. 22.
가을강 살아서 마주 보는 일조차 부끄러워도 이 시절 저 불 같은 여름을 걷어 서늘한 사랑으로 가을 강물되어 소리 죽여 흐르기로 하자 지나온 곳 아직도 천둥 치는 벌판 속 서서 우는 꽃 달빛 난장(亂杖) 산굽이 돌아 저기 저 벼랑 폭포 지며 부서지는 우뢰 소리 들린다 없는 사람 죽어서 불 밝힌 형형한 하늘 아래로 흘러가면 그 별빛에도 오래 젖게 되나니 살아서 마주잡는 손 떨려도 이 가을 끊을 수 없는 강물 하나로 흐르기로 하자 더욱 모진 날 온다 해도 김명인 ♬ Sil Austin - The Rose Tattoo / バラの刺青 2020.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