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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대한 명상 나는 가끔 장마 끝에 열리는 푸른 하늘을 보며 구름의 흐름을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가다가 때로 멈추는 것이 구름이라면 흐르다가 때로 멈추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구름이 아름다운 것은 제 몸을 자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짓고 허무는 데 자유자재한 구름을 나는 때로 우아한 하늘 경작자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구름의 사진을 찍고 싶은 이여 구름의 사진을 찍지 마라 아까의 구름은 지금의 구름이 아니다 끝없이 흘러가면서 학교도 짓고 우체통도 만들고 목화꽃도 피우다가 그것마저 심심해지면 하늘에게 온 몸을 맡기고 저 자신은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구름 나는 열 살 때는 논두렁에 서서 구름을 바라보았고 마흔 살에는 교실의 창문 틈으로 구름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햇살이 풍금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 2020. 7. 20.
낙향을 꿈꾸며 그대 사는 마을의 햇살은 아직도 그렇게 가벼운가 작은 풀꽃은 더 없이 맑게 피어 요요히 가고 일찍 나온 낮달이 하염없이 앉아 있는 콩밭머리 빈손을 툭툭 털어 흰 구름 날아오르는가. 낮은 지붕의 굴뚝마다 저녁 연기 그리운. 잊혀지지 않는다 부엌의 삭정이 타는 불빛 청경우독의 이웃들이 나누는 한 우물의 물맛과 함께 삼경이 가깝도록 도란도란 정을 포개고 주머니 속에 남은 성냥을 그어 별이 빛나는 새벽, 풀섶의 이슬에 바짓가랑이를 흠뻑 적시며 매롱이 눈뜨고 기다리는 가축들을 돌보러 나가는 그대 사는 마을의 햇살은 아직도 그렇게 가벼운가. 김석규 마을 하나가 잔잔한 슬픔으로 걸린다 인기척 내지 않는 나이의 노인네만 나앉아 멀리 숲정이 일렁이는 풍뢰를 듣는 대낮 개망초 하얗게 가고 있는 묵정밭에 새끼를 데리고 고라.. 2020. 6. 30.
마흔살의 동화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 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 2020. 6. 30.
구절리 선평, 정선, 나전, 여량 그 어디쯤 닿고 싶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완행열차를 타고 산골 역 어딘가에 내리고 싶다. 낡아서 삐거덕거리는 나무의자에 앉아 해 지는 풍경을 한 마흔 번쯤 보고 싶다. 살아가다 문득 모든 것이 다 시들하고 황량해질 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훌쩍 떠나고 싶다.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한다거나 절실히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다 스스로를 태우는 짓이라는 것을 철길 지워지는 구절리쯤서 아프게 깨닫고 싶다. 김재진 JETHRO TULL - ELEGY 2020. 6. 27.
내가 바라는 세상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이다 이름 없는 꽃들이 길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 지어 부르게 하는 일이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 붉히면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럼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이다 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 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게 되겠지 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이다 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 식구들이 저녁 상가에 모여 앉아 꽃물 든 손으로 수저를 들 때 식구들의 이.. 2020. 6. 1.
혜화역 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2020. 5. 31.
6월이오면.. 아무도 오지 않는 산 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많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산천을 따라 밀이삭 마늘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것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2020. 5. 23.
편지 나무가 꽃눈을 틔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 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 저무는 꽃 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오세영 Evergreen - Susan Jacks 2020. 4. 24.
슬픈 일만 나에게 사랑이여,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바람도 조금 불고 하얀 대추꽃도 맘대로 떨어져서 이제는 그리운 꽃바람으로 정처(定處)를 정해다오 세상에 무슨 수로 열매도 맺고 저승꽃으로 어우러져 서러운 한 세상을 건너다 볼 것인가 오기로는 살지 말자 봄이 오면 봄이 오는 대로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는 대로 새 울고 꽃 피는 역사도 보고 한 겨울 신설(新雪)이 내리는 골목길도 보자 참으로 두려웠다 육신이 없는 마음으로 하늘도 보며 그 하늘을 믿었기로 산천(山川)도 보며 산빛깔 하나로 대국(大國)도 보았다 빌어먹을, 꿈은 아직 살아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역(西域)에 자고 그 꿈자리마다 잠만 곤하여 녹두꽃빛으로 세월만 다 저물어 갔다 사랑이여, 정작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박정만 Georges Moustaki - .. 2020.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