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842 모슬포에서 오래도록 그리워할 이별 있다면 모슬포 같은 서글픈 이름으로 간직하리. 떠날 때 슬퍼지는 제주도의 작은 포구, 모슬포. 모-스-을 하고 뱃고동처럼 길게 발음하면 자꾸만 몹쓸 여자란 말이 떠오르고, 비 내리는 모슬포 가을밤도 생각이 나겠네. 그러나 다시 만나 사랑할 게 있다면 나는 여자를 만나는 대신 모슬포 풍경을 만나 오래도록 사랑하겠네. 사랑의 끝이란 아득한 낭떠러지를 가져오고 저렇게 숭숭 뚫린 구멍이 가슴에 생긴다는 걸 여기 방목하는 조랑말처럼 고개 끄덕이며 살겠네. 살면서, 떠나간 여잘 그리워하는 건 마라도 같은 섬 하나 아프게 거느리게 된다는 걸 온몸 뒤집는 저 파도처럼 넓고 깊게 깨달으며 늙어가겠네. 창 밖의 비바람과 함께할 사람 없어 더욱 서글퍼지는 이 모슬포의 작.. 2024. 9. 7. 잊혀진 정원 잊혀진 정원에는 배롱나무꽃이 가득하다. 세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온 후 마음에 새겨둔 그리움은 없었지만 염천의 더위를 이끌고 여름이 지나가는 길목이면 옛 선비가 머물렀던 뜨락에 열꽃처럼 붉은 자미화가 피어오른다. 花無百日紅이요 人無千日好라 꽃은 피어서 백일 동안 붉은 수 없고 사람은 천 일이 지나도 한결같이 좋을 수 없으니 지나간 무엇이 한스러울 수 있으랴만 뜨거운 태양 아래 구름처럼 일어나는 꽃들은 생의 모진 미련과 애모를 보여 주는 듯하다. 주렴에 머물던 달빛처럼 다정하고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처럼 굳건하였건만 .. 2024. 8. 1. 양수리로 오시게 가슴에 응어리진 일 있거든 미사리 지나 양수리로 오시게 청정한 공기 확 트인 한강변 소박한 인심이 반기는 고장 신양수대교를 찾으시게 연꽃들 지천 이루는 용늪을 지나 정겨운 물오리 떼 사랑놀이에 여념이 없는 아침 안개 자욱한 한 폭의 대형 수묵화 이따금 삼등열차가 지나는 무심한 마을 양수리로 오시게 그까짓 사는 일 한 점 이슬 명예나 지위 다 버리고 그냥 맨 몸으로 오시게 돛단배 물 위에 떠서 넌지시 하늘을 누르고 산그림자 마실 나온다 저녁답 지나 은구슬 보오얗게 사운거리는 감미로운 밤이 오면 강 저편 불빛들 일렬종대로 서서 지나는 나그네 불러 모으는 꿈과 서정의 마을 .. 2024. 7. 6. 주막(酒幕)에서..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威儀)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친 길은 가없고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 2024. 5. 29. 집으로 가는 길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신경림 Elegy - Jethro Tull(London Symphony Orchestra) 2024. 4. 12. 겨울저녁의 詩 사위가 고요한 겨울 저녁 창 틈으로 스미는 빙판을 지나온 바람을 맞으며, 어느 산골쯤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밤을 견딜 나무들을 떠올렸다 기억에도 집이 있으리라, 내가 나로부터 가장 멀 듯이 혹은 내가 나로부터 가장 가깝듯이 그 윙윙거리는 나무들처럼 그리움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에 대한 나의 사랑도 추위에 떠는 것들이었으리라 보잘 것 없이 깜박거리는 움푹 패인 눈으로 잿빛으로 물들인 밤에는 쓸쓸한 거리의 뒷골목에서 운명을 잡아줄 것 같은 불빛에 잠시 젖어 있기도 했을 것이라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들은 제게도 뜻이 있어 희미하게 다시 사라져가고 청춘의 우듬지를 흔드는 슬픈 잠 속에서는 서로에게 돌아가지 않는 사랑 때문에 밤새도록 창문도 덜컹거리고 있으리라 박주택 ♬ NOCTURNE op. 9 no. 1 in.. 2023. 11. 26.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 비구니 스님들 사는 청도 운문사 뒤뜰 천 년을 살았을 법한 은행나무 있더라 그늘이 내려앉을 그늘자리에 노란 은행잎들이 쌓이고 있더라 은행잎들이 지극히 느리게 느리게 내려 제 몸 그늘에 쌓이고 있더라 오직 한 움직임 나무는 잎들을 내려놓고 있더라 흘러내린다는 것은 저런 것이더라 흘러내려도 저리 고와서 나무가 황금사원 같더라 나무 아래가 황금 연못 같더리 이 세상 떠날 때 저렇게 숨결이 빠져나갔으면 싶더라 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뒤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 다 부려놓고 가고 싶더라 내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다 가고 싶더라 문태준 2023. 11. 9. 늙은 억새의 노래 꽃처럼 향기는 없지만 무르녹을 그늘도 없지만 이 가을에는 바람 부는 언덕에서 들풀로서의 삶을 다함없이 이루도록 지켜주옵소서 버려야할 마음을 버리지 못해 가식으로 하늘 향해 무릎을 꿇었으며 시새워 욕심의 칼날을 세웠던 지난 날들의 죄를 고백하오니 사랑의 주님 용서해 주옵소서 아름다운 꽃들을 증오하지 않겠습니다 곱게 물드는 잎새들도 부러워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 영혼의 불을 밝히고 싶습니다 작은 지혜와 노력으로 삼복염천을 버티며 익힌 나의 눈물겨운 분신들을 거친 바람결에 딸려보내오니 부디 당신께서 소용되는 곳에 써 주옵소서 박해옥 2023. 10. 20. 물빛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로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 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2023. 10. 15. 이전 1 2 3 4 ··· 9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