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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집 한 채 있으면 좋겠네 낮은 쪽담 둘러 백목련 자목련 서너 그루쯤 품고 있고 그 아래 백합과 수국이 촘촘하고 마당 제일 깊숙한 곳에 국화가 몇 이랑 빼곡이 심어져 있는 집 뒤꼍에 나가면 열 뼘 채마밭 상추랑 쑥갓이랑 배추랑 심어 놓고 호박이랑 풋고추랑 실파랑 심어 놓고 배부른 장독에서 된장 퍼지게 담아 낡은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이고 모락모락 김 오른 보리밥 한 사발에 등나무 넝쿨진 평상에 앉아 한 잔 반주 청하면 설운 님 사연이 한 잔이요 설운 내 사연이 한 잔이요 주워들은 남 사연도 설운 한 잔이라 넓은 흙마당 해는 뒷걸음질쳐 사라지고 무정한 바람에 꽃도 잎도 지고 잡을 수 없는 내 청춘 권주가도 서글퍼 취한 몸 뉘이면 아질한 흙내가 젖은 눈 감겨주고 떠나간 얼굴들 별 되어 나를 보고 있으리 속절없이 하얀 눈 쏟아지는 겨울날.. 2022. 8. 22.
인생을 다시 산다면.. 큰 산자락 아래로 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토담집 안 뜨락에는 사철 꽃이 연잇는 흙내 나는 곳에 태어나리라 장독대 뒤뜰의 봉숭아 꽃물 들이는 첫사랑 순이와 볼그레한 미래의 꿈들에 관해 얘기하리라 꽃을 담는 눈빛으로 연인에게 자상할 것이며 그의 동선이 편안해지도록 주변을 살필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다정한 눈높이로 대할 것이고 아프지 않게 보호하며 미래의 꿈과 행복에 대해 논할 것이다 긴장을 풀고 몸은 부드럽게 하리라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산에도 더 자주 갈 것이며 오래된 벗들과 담소도 즐기리라 가난한 삶에 대해서는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며 석양 노을 곱게 물들어가듯이 평화롭게 자유롭게 노후를 보낼 것이다. 김재진 Orla Fallon - Down By Sally Gardens 2022. 6. 21.
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 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 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도종환 2022. 4. 12.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2022. 3. 10.
해남길, 저녁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두운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놀빛 물려놓는 남녘의 바다는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갖 소리를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아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먹빛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 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머리가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것이 이 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보는데 실루엣을 단단하게.. 2022. 2. 25.
동백꽃 편지 내고향 남쪽바닷가 바람모퉁이 숲에서 툭하고 동백꽃이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꽃송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철없던 시절 사랑같기도 하고 홀로 떠돌아 흐르던 추억 같기도하고 무심코 발견한 지난날의 연서 같기도 합니다 시나브로 봄은 오는데 꽃은 떨어져 쌓이고 선홍색 슬픔을 뒤척이며 세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대는 지금 어느바다위를 헤메이는 가여운 넋이되어 있습니까 바라보면 길위에는 초사흘 달빛이 흐르고 은빛 물보라를 일으키는 수평선너머 까마득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바다에는 못다한 사랑처럼 동백꽃이 지고 있습니다 외마디 비명처럼 등뒤에서 툭하고 떨어집니다 이승에서 짧은 생애를 샘물처럼 고이는 슬픔만 남기고 그대는 지금 어느길섶에 앉아서 여위어 가는지요 바다에는 온전히 떨어져 누운 붉은 꽃송아리뿐 그대를 기다리는 일이 피었.. 2022. 2. 9.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 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2021. 12. 17.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파른 현실을 올라가면 그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의 숨결과 그림자와 눈물을 사랑한다 눈 날리는 하늘가에서 아이들이 방방 뛰놀듯이 나는 그사람의 마당과 지붕과 하늘을 거닐고 있다 메마른 골목을 쭈욱 따라가면 그곳에서 따뜻한 밥을 지어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의 반찬과 밥을 숟가락질 한다 어둠이 내려와 서성거리는 하늘밑 집, 그 집 방의 이불 속에 내 귀와 마음을 숨기고 그 사람에게 내 첫정을 아뢰고 싶다 눈 내린 가파른 현실을 올라가다 미끄러지고, 엎어져 첫눈을 원망도 했다 그러나 첫눈에 많은 설레임을 앓으며 가끔 냉대한 길가에 주저앉고 싶기도 하고 미끄럼 타고 세상 저 밑으로 가고 싶기도 했지만 하늘밑 그 집에서 잠 자는 그 사람이 그리웠다 나는 그 사람의 새하얀 눈물.. 2021. 11. 8.
귀로 돌아오는 길은 늘 혼자였다 가는 겨울해가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내 마음도 무너져왔고, 소주 한 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버스를 타는 동안에 차창 밖엔 소리없이 눈이 내렸다 그대를 향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둔다는 것, 그것은 정말 소주병을 주머니에 넣듯 어딘가에 쉽게 넣어 둘 일은 못 되었지만 나는 멍하니 차창에 어지러이 부딪쳐오는 눈발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2021. 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