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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담장 안팎을 끌고 당겨 하나의 풍경을 만드는 능소화 금간 담장에 걸터앉아 갈라진 틈을 봉합하고 있다 한때 저 담장의 몸이었던 적 있었다 삶과 소통하지 못하고 벽으로 서서 근심으로 금 그어지던 몸 견딘 것들과 견뎌야할 것들 사이 살아온 방식과 살아갈 방식 사이 바람직한 세계와 나 사이 느끼지 못한 틈새의 거리지만 비애 쪽으로 넘어지다 간절함으로 곧추세우며 놓았다 붙잡은 생사(生死) 거리만큼의 틈으로 금 그어졌다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은 저 꽃이었다 어슬녘에 걸터앉아 한 송이 피워 열 송이 피워 수백 송이로 담장과 하나 되어 경계를 지우는 능소화 구름도 연연하던 시간을 포용하며 풍경을 아우르고 있다 이원희 2023. 7. 1.
그 길은 아름답다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담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 2023. 4. 19.
가을의 노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가을에는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고 그 맑은 마음결에 오직 한사람의 이름을 떠보낸다 주여! 라고 하지 않아도 가을엔 생각이 깊어진다 한 마리의 벌레울음소리에 세상의 모든 귀가 열리고 잊혀 진 일들은 한 잎 낙엽에 더 깊이 잊혀진다 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 경험의 문을 두드리면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거라 말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산자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사자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 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이란 말 속에 있다 김 대규 2022. 10. 15.
다시, 가을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을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도종환 Shubert Ständchen (serenade) - Fritz Wunderlich 2022. 9. 27.
9월도 저녁이면..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 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강연호 2022. 9. 3.
그런 집 한 채 있으면 좋겠네 낮은 쪽담 둘러 백목련 자목련 서너 그루쯤 품고 있고 그 아래 백합과 수국이 촘촘하고 마당 제일 깊숙한 곳에 국화가 몇 이랑 빼곡이 심어져 있는 집 뒤꼍에 나가면 열 뼘 채마밭 상추랑 쑥갓이랑 배추랑 심어 놓고 호박이랑 풋고추랑 실파랑 심어 놓고 배부른 장독에서 된장 퍼지게 담아 낡은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이고 모락모락 김 오른 보리밥 한 사발에 등나무 넝쿨진 평상에 앉아 한 잔 반주 청하면 설운 님 사연이 한 잔이요 설운 내 사연이 한 잔이요 주워들은 남 사연도 설운 한 잔이라 넓은 흙마당 해는 뒷걸음질쳐 사라지고 무정한 바람에 꽃도 잎도 지고 잡을 수 없는 내 청춘 권주가도 서글퍼 취한 몸 뉘이면 아질한 흙내가 젖은 눈 감겨주고 떠나간 얼굴들 별 되어 나를 보고 있으리 속절없이 하얀 눈 쏟아지는 겨울날.. 2022. 8. 22.
인생을 다시 산다면.. 큰 산자락 아래로 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토담집 안 뜨락에는 사철 꽃이 연잇는 흙내 나는 곳에 태어나리라 장독대 뒤뜰의 봉숭아 꽃물 들이는 첫사랑 순이와 볼그레한 미래의 꿈들에 관해 얘기하리라 꽃을 담는 눈빛으로 연인에게 자상할 것이며 그의 동선이 편안해지도록 주변을 살필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다정한 눈높이로 대할 것이고 아프지 않게 보호하며 미래의 꿈과 행복에 대해 논할 것이다 긴장을 풀고 몸은 부드럽게 하리라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산에도 더 자주 갈 것이며 오래된 벗들과 담소도 즐기리라 가난한 삶에 대해서는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며 석양 노을 곱게 물들어가듯이 평화롭게 자유롭게 노후를 보낼 것이다. 김재진 Orla Fallon - Down By Sally Gardens 2022. 6. 21.
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 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 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도종환 2022. 4. 12.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2022.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