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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노래 대동, 하늘공원의 일몰 나는 저녁이 좋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어스름을 앞세우고 어둠은 갯가의 조수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딸네집 갔다오는 친정아버지처럼 뒷짐을 지고 오기도 하는데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벌레와 새들은 그 속의 어디론가 몸을 감추고 사람들도 뻣뻣하던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가며 하늘에는 별이 뜨고 아이들이 공을 튀기며 돌아오는 골목길 어디에서 고기를 굽는 냄새가 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돌아보기도 하지만 나는 이내 그것이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안다 나는 날마다 저녁을 기다린다 어둠 속에서는 누구나 건달처럼 우쭐거리거나 쓸쓸함도 힘이 되므로 오늘도 나는 쓸데없이 거리의 불빛을 기웃거리다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이상국 Asha - M.. 2019. 6. 6.
당신의 나라 언제나 당신은 저만치에만 있습니다 내가 다가갈 수 없는 꼭 그만치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당신이 나에게 일러 준 듯한 당신에게 갈 수 있는 비밀의 문을 지금도 찾지 못한 채 나에게는 밤낮을 걸어도 끝이 없는 당신만이 사는 그 갈 수 없는 나라에 다가가지 못하고 오늘 밤도 나는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어느 땅 위에 성(城)을 짓고 나를 그리로 오라 합니까 내 당신을 만나는 날 나는 당신에게 바칠 작은 노래를 준비하며 당신의 곁에서 불살라 버릴 내 영혼을 붙들고 오늘 밤도 당신을 향하여 생명을 깎고 있습니다. 서주홍 Mary in The Morning - Al Martino 2019. 5. 10.
바다를 보았네 봄날 당신과 함께 무창포 바다를 보았네 바다는 당신의 이마쯤에 닿아 눈썹 짙은 그늘로 젖어 있고, 당신과 나 사이에도 쏟아지는 햇살, 잠시도 가만히 쉬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와 당신 사이에도 저리 많은 파도가 출렁였던가, 저렇게도 많은 물결이 부서졌었던가 생각했네 무시로 다가와 무너지는 저 바다를 향해서 내 안에 거듭 거세게 일어서던 파도 잦아들며 점 점 떠오르는 섬 무창포를 보았네 당신과 나 사이의 저 수많은 파도를, 봄날 당신과 함께 김완하 Opus...Walking On Air 2019. 4. 10.
11월이 가기 전에 세상의 잎 다 지는 계절이어도 그대 가까이 다가서서 흩날리는 낙엽은 되지 말아야겠네 눈치도 없이 속만 태우다 가까스로 목숨 부지하는 분별력 없는 마지막 잎새도 되지 말아야겠네 모르게 아주 져 버리든지 바스락대는 울림은 꼭꼭 숨겨나 두든지 끝끝내 지키지 못하는 한 생애의 부질없는 약속이여! 돌이켜보면 내게 있어 당신이 초록으로 눈부셨던 적 그래도 많았더라 그 넘치는 눈부심 때문에 서둘러 나 혼자 단풍 든 날도 있었네 완전한 숲으로 배겨나지 못할 바에는 강이나 하나 우리 사이에 둘 것이지 그 흐르는 물결에 이마 짚는 바람이나 될 것이지 허후남 ♬ 東邪西毒 ost, A favorite Love (摯愛) 2018. 11. 2.
등불 주렁주렁 열린 감, 가을 오자 나무들 일제히 등불을 켜 들었다. 제 갈 길 환히 밝히려 어떤 것은 높은 가지 끝에서 어떤 것은 또 낮은 줄기 밑동에서 저마다 치켜든 붉고 푸른 사과 등, 밝고 노란 오렌지 등, ...... 보아라 나무들도 밤의 먼 여행을 떠나는 낙엽들을 위해선 이처럼 등불을 예비하지 않던가. 오세영 ♬ Kevin Kern - Bittersweet 2018. 10. 21.
이 세상 가장 먼길 이 세상 가장 먼 길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몸속 유숙하는 그 많은, 허황된 것들로 때로 황홀했고 때로 괴로웠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날 길의 초입에 서서 나는 또, 태어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분홍빛 설레임과 푸른 두려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괜시리 주먹 폈다 쥐었다 하고 있을 것이다 이재무, 먼길 눈을 감으면 먼 곳의,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도 못할 사람들의 삶의 그림자가 몇 개 떴다 지워집니다 아직 충분히 젊긴 하지만 예전처럼 젊지 않다는 것을 문득 느낄 때, 나는 내가 낯설어집니다. 꼬부라진 길을 끝도 한도 없이 걸어야 하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외면하지 말고 세상일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나이가 되어 .. 2018. 9. 13.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담양 명옥헌의 배롱나무 서편제 Ost 천년학 - 김수철 2018. 9. 4.
서해에서.. 그대 마음이 묵정밭 같아서 우리 함께 서해 바다를 보러 가자 했었지 삼각파도나 모래톱이나 칼날진 해풍쯤에 그대 마음의 뻗센 잡초 베어질 리 만무했지만 어쩌면 서해 일몰 속에 활활 타올라 화전이라도 다시 일굴 줄 알았지 우리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부산떨었는데 갯벌 기어가듯 느리고 더딘 행려 내 급한 생각만이 솟구치는 물결을 타고 지도책에서 배운 산동반도까지 헤엄쳐갔을 뿐 정작 그대는 서해로 질러가는 길을 피해 왜 자꾸 멀리멀리 돌아서 가자 했을까 서해, 죽은 바다와 황사바람 속에서 바닷새 몇 마리 사람 기척에 질려 있었지 기억해? 붉은 노을이 그대 뺨에 젖어내리는 동안 가슴엔 듯 둔탁하게 자갈 굴러가던 것을 그대를 넘어 바다로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 내 지친 목측 서둘러 침몰시키던 것을 그대 기억해?.. 2018. 8. 12.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 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 2018.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