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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그대를 보내노니 푸른 산길에 자욱히 꽃잎이 흩날리노라 가고 가면 꽃비 속에 백일(白日)은 지리 날 두고 그대 홀로 떨치고 간 소매가 섧지 않으랴 -送行/趙芝薰- 이유라 - 천년동안 2018. 6. 11.
눈물을 위하여.. 저 맑은 햇살 속 강변의 미루나무로 서고 싶다 미풍 한 자락에도 연초록 이파리들 반짝반짝 한량없는 물살로 파닥이며 보석 알갱이 마구 뿌려대며 저렇듯 구비구비 세월의 피를 흐르는 강물에 긴 그림자 드리우고 싶다 그러다가 그대 이윽고 강뚝에 우뚝 서서 윤기 흐르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며 저 강물 끝으로 고개 드는 그대의 두 눈 가득 살아 글썽이는 그 무슨 슬픔 그 무슨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그대의 묵묵한 배경이 되어도 좋다 그대의 뒤로 돌아가 가만히 서서 나 또한 강 끝 저 멀리로 눈뜨는 멀쑥한 뼈의 미루나무가 되고 싶다 고 재종 Please Remember Me - Aaron Neville 2018. 4. 23.
다시 그리움은 일어 봄바람이 새 꽃가지를 흔들 것이다 흙바람이 일어 가슴의 큰 슬픔도 꽃잎처럼 바람에 묻힐 것이다 진달래 꽃편지 무더기 써갈긴 산언덕 너머 잊혀진 누군가의 돌무덤 가에도 이슬 맺힌 들메꽃 한 송이 피어날 것이다 웃통을 드러낸 아낙들이 강물에 머리를 감고 오월이면 머리에 꽂을 한 송이의 창포꽃을 생각할 것이다 강물 새에 섧게 드러난 징검다리를 밟고 언젠가 돌아온다던 임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보리꽃이 만발하고 마실 가는 가시내들의 젖가슴이 부풀어 이 땅 위에 그리움의 단내가 물결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곁을 떠나가주렴 절망이여 징검다리 선들선들 밟고 오는 봄바람 속에 오늘은 잊혀진 봄 슬픔 되살아난다 바지게 가득 떨어진 꽃잎 지고 쉬엄쉬엄 돌무덤을 넘는 봄. 곽재구 Le Ruisseau De .. 2018. 4. 7.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너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 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 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 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남진우 Last exit to Brooklyn (Violin Ver) "A Love Idea” 2018. 3. 27.
4월에 걸려온 전화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 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정일근 바람의 .. 2018. 3. 25.
우체국 계단에 앉아.. 화사한 봄날 오래된 통장 하나를 정리하기 위해 우체국에 갔다 언제부턴가 우체국이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부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잔고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러 가는 곳이 되었을까 낡은 통장을 창구에 들이밀다가 나는 문득, 삶이 쓸쓸해져서 우체국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누런 포장지에 싸인 소포와 항공편지를 어디론가 부치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그 동안 받기만 하여서 부치는 것을 잊어버린 먼 그리움에 목이 말라 수첩을 꺼내 주소를 찾아보지만 내 낡은 수첩은 어느새 많은 이름들을 지우고 있었다 팬지꽃이 노랗게 웃고 있는 우체국 계단에 기대서서 희미해진 이름들을 떠올린다 미국에도 있고 호주에도 있는, 몇 장의 엽서를 손에 쥔 나는 살아있는 한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이름들을 되찾은 반가움으로 우체국.. 2018. 3. 25.
어느 날, 우울한 다짐 2월의 끝, 그것은 겨울의 끝인가 오래 잊었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나는 창문을 연다 안짱다리처럼 어기적어기적 내리는 비가 파리한 나뭇가지를 유심히 진맥하고 나는 묵은 유행가 한 자락을 들추며 고작 담배나 피운다, 얕은 처마 아래로 아직 젖지 않은 예감 막막해도 흐르는 세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온몸 뼈마디마다 두껍게 녹이 슨다 그러니 바람이여, 내 목덜미를 어루만진들 등골까지 서늘해지겠느냐, 한 죽음의 기별이 메마른 기억의 벌판에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켜 밭은 기침이라도 나오겠느냐 저 고단한 봄날은 일찌감치 희망을 압류하는데 겨우내 꿰매지 않고 지낸 호주머니의 구멍이 생각나 새삼 손가락 하나 허방에 빠진 듯 허전하고 공연히 높은 산 어딘가 버짐처럼 남았을 눈이나 떠올려볼 뿐, 정녕 하릴없이 헐거워져도.. 2018. 2. 13.
봄길과 동행하다 움 돋는 풀잎 외에도 오늘 저 들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꽃 피는 일 외에도 오늘 저 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종일 풀잎들은 초록의 생각에 빠져 있다 젊은 들길이 아침마다 파란 수저를 들 때 그때는 우리도 한번쯤 그리움을 그리워해 볼 일이다 마을 밖으로 달려나온 어린 길 위에 네 이름도 한번 쓸 일이다 길을 데리고 그리움을 마중하다 보면 세상이 한 번은 저물고 한 번은 밝아 오는 이유를 안다 이런 나절엔 바람의 발길에 끝없이 짓밟혀라도 보았으면 꽃들이 함께 피어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 꽃의 언어로 편지를 쓰고 나도 너를 찾아 봄길과 동행하고 싶다 봄 속에서 길 잃고 봄 속에서 깨어나고 싶다 이기철 2018. 2. 12.
겨울 숲을 아시나요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잎 지고새 떠나간 겨울 숲에는외로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남아 윙윙 부는바람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인기척에 놀라 툭,소리도 없이 떨어지는삭정이만 사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어 꽃씨가 산답니다파릇파릇 새순이 산답니다 부끄럽게 웃고 있는꽃무리도 숨어살아요당신을 사랑하는내 마음도 숨어살지요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초조해하지는 말아요희망한다는 것은어둠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니까요 겨울 숲에는 두근두근설레는 봄날이 숨어살아요 홍수희 ♬ Loving - Roma Downey 2018.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