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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그늘에 앉아보렴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 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 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 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 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 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 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 통장도 벗어 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 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우리 삶 벌 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2020. 3. 22.
探梅行 옛사람이 말했다. 봄을 찾는다고 동쪽으로 가지 마라. 서쪽 뜰에 매화가 이미 찬 바람속에 피어 있다. 어리석은 사람 다시 길을 떠난다. 매화꽃 향기 아득하여 천리밖 남쪽으로 마음이 먼저 떠돌아 흐르다. 산골짜기 오두막은 인적이 없고 처마밑 남포등도 뒤란 장작더미도 철쭉나무도 여윈 매화나무 가지도 老長의 숨결 가득하다. 분분이 나리는 눈속에서 동백꽃 한 송이 매화꽃 한 송이 어루만지며 가시던 길 덧없는 봄날이었다. 시린 하늘가에 초발심처럼 피는 꽃 무르익지 않은 시절의 노래가 온 산하에 봄볕으로 피어날 때 꽃들에게 길을 묻는다. 세상은 어찌하여 이리 시비가 많은가. 세상은 어찌하여 이리 분별이 많은가. 세상은 어찌하여 이리 번뇌가 많은가. 이형권 꽃별 해금연주 - 수선화 2020. 3. 21.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렸지만 그때 당신이 편지를 시작하며 썼던 그 한마디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당신과 헤어진 뒤 벌써 셀 수 없이 많은 봄이 들판의 냉이꽃을 피우고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냉이꽃을 보며 나는 집을 나와 계절이 바뀌는 철길을 따라 끝없이 걷곤 합니다 문득 지난 가을 벗들과 어울려 찾아갔던 산수유 마을의 정경이 떠오르는군요 지천으로 매달려 있던 산수유 붉은 열매를 보석인 양 바라보며 당신이 보냈던 그 편지를 생각했습니다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세월이 가도 사랑은 그렇게 가슴에 따뜻한 그림 하나 남기는가 봅니다 -김재진,《먼산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중에서 Chris De Burgh - Lady In Red 2020. 3. 9.
제비꽃에 대하여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가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안도현 Ruhe Sanft, Mein Holdes Leben (Mozart, Zaide) - Emma Kirkby 2020. 3. 2.
봄편지 구례군 산동면에 지금 산수유 노란 꽃물결이 흐른다는 소식 하나 받았습니다 섬진강 변의 다압마을엔 매화꽃 흐드러지고 지나는 사람마다 마음이 걸려 허방에 빠진 사람들 꽃 그림자진 그늘마다 몽울몽울 피어나는 추억과 앉아 있다고도 합니다 마음 붙들려 지상에 발 닿지 못 하고 얼마쯤 떠서 몽유인 듯 걸어가는 봄날 나도 당신이라는 꽃에 마음을 죄다 쏟아 붓고 어질어질 향기 물어 나르다 주저앉는 바람처럼 노곤히 그대 그늘에 머물고 싶습니다 지상은 지금 화사하게 물든 꽃 편지지 한 장 그 위에 자꾸 편지를 쓰라고 합니다 남유정 Done With Bonaparte - Mark Knopfler 2020. 2. 27.
그리움에게 그대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전라선, 지나치는 시골역마다 겨울은 은빛 꿈으로 펄럭이고 성에가 낀 차창에 볼을 부비며 나는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 기술학교 야간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등기사인 그놈의 자랑스런 작업복에 대해서 절망보다 강하게 그놈이 쏘아대던 카바이드 불꽃에 대해서 월말이면 그놈이 들고 오는 십만원의 월급봉투에 대해서 나는 얼마 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얼굴 한번 거리에서 마주친 적도 어깨 나란히 걸음 한번 옮긴 적 없어도 나는 절망보다 먼저 그대를 만났.. 2020. 2. 23.
가정법 고백 사랑 고백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 한마디를 입에서 꺼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사랑 고백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김승옥이 무진 기행에서 이라고 했던 의미를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가슴에 눌러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하면 말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그 한마디를 하고 싶었지만 입안의 침만 마를 뿐,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얼굴이 희미하게 보이는 어두운 골목에 이르러 그녀에게 고백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면 어쩌겠니." 오, 어리석었던 가정법 고백 박상천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 김승옥의 중에서. Demis Roussos.. 2020. 2. 21.
푸른 국도 九州横断の道 やまなみハイウェイ 길가의 집 앞에 기다림이 쪼그려 앉아 하염없는데 끊길 듯 끊길 듯 필사적으로 뻗어간 이 길 길을 오가며 보던 차창에 비치던 옛 얼굴은 어디서 미라같이 쪼그라들고 있는지 길은 블랙홀로 자꾸 나를 빨아들이고 나는 소실점 하나로 길 위에 남았지만 그래도 사고다발지역을 지나면서 이 곳에 이르러서 불행해진 사람을 위해 성호를 그으면 폐가가 있는 길가의 쓸쓸한 풍경이 담뱃불 같이 잠시 환해진다 옛날 푸른 등같이 사과가 매달렸던 길가의 과수원이 사라졌는데 탱자 꽃 하얀 관사의 오후도 사라졌는데 아직도 길 위에 자욱한 사라지는 것들의 발소리 그래도 사라지는 것들을 배려해 누가 켜준 저 가물거리는 등불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밤 몇 눈금의 목숨을 길 위에 써버리더라도 안개 피는 새벽쯤이면 이.. 2020. 1. 12.
너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너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르고 떠난 후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누군가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가를 알지만 자작나무니 풀꽃으로 부르기 위해 제 영혼의 입술을 가다듬고 셀 수 없이 익혔을 아름다운 발성법 누구나 애절하게 한 사람을 그 무엇이라 부르고 싶거나 부르지만 한 사람은 부르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거나 세상 건너편에 서 있다 우리가 서로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무엇이 되어 어둑한 골목에 환한 외등이나 꽃으로 밤새 타오르며 기다리자 새벽이 오는 발소리를 그렇게 기다리자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불러주었듯 너를 별이라 불러주었을 때 캄캄한 자작나무숲 위로 네가 별로 떠올라 휘날리면 나만의 별이라 고집하지 않겠다 너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난.. 2020.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