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838

가을 길 이 길 끝나는 그 어디쯤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네 나무도 선 채로 눈물을 떨구고 코스모스도 부끄러워 제 몸만 흔드는데 가을은 온통 황홀한 참회의 마당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많은 것 원하고 감추기에 급급하였네 이별 앞에 서면 눈이 맑아져 내 안의 슬픔도 제 어둠을 보이느니 사랑이라 부르던 숱한 이유가 그대 오시는 길 가로막았네 여기 비로소 너무 쉽게 입었던 거짓 자아 일랑 가볍게 벗어 희인 들꽃 입고 네게 가리니 이 길 끝나는 어디쯤에서 부디 당신을 만나고 싶네 홍수희 ♬ 영혼의 눈물 (Scat 서리은) - SBS 드라마 '물병자리" OST [원곡,멘델스존, Venetian Gondolier Song In F Sharp Minor] 2020. 10. 17.
기차를 기다리며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역은 또 얼마나 긴 기차를 밀었는지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버린다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 기차는 기다려보니 알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차역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기차를 지나친 나였는지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여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운다 기차를 기다리는 건 수없이 기차역을 뒤에 둔다는 것 한순간에 기적처럼 백년을 살아버리.. 2020. 10. 15.
저 강물 건너 그런 일이 있었던가 늦더위도 물러간 시월 어느날 텅 비어 서러운 푸른 하늘 속 금산사 찾아갔던가 절 아래서 나물밥을 사먹고 일없이 목메이는 붉은 단풍숲 함께 걸었던가 어둠속에 영영 갈라졌던가 가을이란다 이 나라는 또 가을이란다 거짓말처럼 반짝이는 저 강물 건너 어디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심호택 Franco Corelli - E. De Curtis /" Tu ca nun chiagne "(너는 왜 울지 않고) 2020. 10. 15.
가을 화엄사 그리움에도 시절이 있어 나 홀로 여기 지나간다 누군가 떨어뜨린 부스럼 딱지들 밟히고 밟히어서 더욱 더디게 지나가는데 슬픈 풍경의 옛 스승을 만났다 스승도 나도 떨어뜨리고 싶은 것 있어 왔을 텐데 너무 무거워서 여기까지 찾아왔을 텐데 이렇게 저렇게 살아온 발바닥의 무늬 안 보이는 발그림자 무게를 내 다 알지 하면서 내려다보는 화엄사의 눈매 아래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인가 탁탁, 탁탁, 탁탁 모질게 신발을 털며 가벼웁게 지나가려 해도 안 떨어지는 낙엽 화엄사의 낙엽은 무엇의 무게인가 박라연 김영동 - 은행나무침대 2020. 9. 19.
삶에 있어서 조용함에 관하여 옛사랑이 그리울 때가 있다 잊혀진 많은 것들이 있지만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떠오르거나, 길을 걷다가 스치는 버스 안에 잠시 비친 어떤 얼굴이 꼭 그 사람 같기도 하다 한때는 행복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 경우가 많다. 혹은 직장에서 학교에서 한마디 고백도 못한 채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고 결혼을 하게 된다 인연이 아니겠지 하고 잊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 속에서 안개처럼 늘 피어나는 얼굴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미 바뀌어버린 전화번호를 낡은 수첩에서 찾아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하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할 때 차라리 잊혀졌으면 싶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지난 세월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2020. 9. 10.
고독이 거기서 ..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바닷가에 '고독'이라는 카페가 있다 통나무로 지은 집인데 지날 때마다 마당에 차 한대 없는 걸 보면 고독이 정말 고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은 아주 오래된 친구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혼이나 밤을 맡겨놓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온몸을 간판으로 호객행위를 하며 사는 게 어려워 보인다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으므로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가끔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고독이 거기서 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 이상국 시집 2012 Solitude's My Home/Rod McKuen 2020. 9. 8.
9월도 저녁이면..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 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강연호 Asha - Mayflower 2020. 9. 6.
구월이 오면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 2020. 8. 28.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나팔꽃 새 움이 모자처럼 볼록하게 흙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질까 두렵다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와 새끼 새의 입에 넣어주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따뜻해질까 두렵다 몸에 난 상처가 아물면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저 추운 가지에 매달려 겨울 넘긴 까치집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이 도시의 남쪽으로 강물이 흐르고 강둑엔 벼룩나물 새 잎이 돋고 동쪽엔 살구꽃이 피고 서쪽엔 초등학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북쪽엔 공장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서문시장 화재에 아직 덜 타고 남은 포목을 안고 나오는 상인의 급한 얼굴을 보면 찔레꽃 같이 얼굴 하얀 이학년이 가방을 메고 교문을 들어가는 걸 보면 눈 오는 날 공원의 벤치에 석상.. 2020.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