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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에 대하여.. 그대 쓸쓸함은 그대 강변에 가서 꽃잎 띄워라 내 쓸쓸함은 내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마 그 꽃잎 얹은 물살들 어디쯤에선가 만나 주황빛 저녁 강변을 날마다 손잡고 걷겠으나 생은 또 다른 강변과 서걱이는 갈대를 키워 끝내 사람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것 있으리라 그리하여 쓸쓸함은 사람보다 더 깊고 오랜 무엇 햇빛이나 바위며 물안개의 세월, 인간을 넘는 풍경 그러자 그 변치 않음에 기대어 무슨 일이든 닥쳐도 좋았다 김경미 Lotus Of Heart / 王森地(水晶琴) 2019. 12. 22.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 2019. 12. 11.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시간의 재가 되기 위해서 조용히 타오르기 때문이다 아침보다는 귀가하는 새들의 모습이 더 정겹고 강물 위에 저무는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이제 하루 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람도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아름답다 마지막 옷깃을 여미며 남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이별하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세상에 뿌리 하나 내려 두고 사는 일이라면 먼 이별 앞에 두고 타오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 추운 겨울 아침 아궁이를 태우는 겨울 소나무 가지 하나가 꽃보다 아름다운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 아니겠느냐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어둠도 제 살을 씻고 빛을 여는 찬란한 아픔이 된다 이상윤 Enya - How Can I Keep From Singing 2019. 11. 29.
그대에게 가는 길.. 안산,누에섬 일몰 그대를 죽어라 사랑하고 싶은데 가장 절실한 말을 몰라 허둥대던 날 글 쓰고 책 읽기도 시큰둥한 날 무작정 차 몰고 서해로 갔네 해 뜨고 진눈깨비 내리는 진창길 그대 만날까 싶어 차를 몰았네 인륜도 아니고 불륜도 아닌 정치도 아니고 치정도 아닌 내 마음이 발뻗는 외로움의 끝 그 적막한 뒤란 어딘가에는 필경 그대에게 가는 길 열릴까 싶어 마음과 몸이 함께 달렸네 썰물 다음 드러난 대부도 뻘밭 그 허망한 치부 어딘가에서도 혹시 착한 새끼게 몇쯤 만날까 싶은 날 난바다를 달려온 물너울들이 내게 무슨 말 하려 달려들다가 저런! 방파제에 온몸을 짓찧고 물러서는 물러섰다 또 덤벼드는 눈 시린 투신 물 맑은 치정을 보네 임영조 Art Garfunkel - Down In The Willow Garden 2019. 11. 15.
가을밤 어머니 박두거니 서마지기 무논에는 오늘밤도 기러기 떼가 날아오르는지요. 동네 사람들 모두 돌아간 뒤에도 우리 집 논에는 언제나 긴 그림자 부산거리고 기러기 떼는 산 밑에서 바다 쪽으로 날아오르고 있었지요. 팔에다 무명베 토시를 낀 누님이랑 명아주대처럼 취해 계시던 아버지랑 긴 논둑길을 따라 벼 낟가리를 헤아리던 나는 산그늘처럼 깊은 어둠 속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았지요. 어덩 밑에 풀 뜯던 송아지의 워낭 소리 짤랑거리고 분둣골 제각에 남폿불이 깜박거릴 때 우리 집 논에는 푸짐하게 내리던 달빛이 있었습니다. 제금을 나와 처음으로 장만했다는 서머지기 논에는 논벌보다 깊은 희망이 있었고 신명이 든 나는 줄지어 달리며 벼 낟가리를 몇 번이고 헤아리며 셈을 하였지요. 바다에서 산 밑으로 다시 기러기 떼가 날아오르.. 2019. 11. 2.
가을억새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고개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 2019. 10. 5.
쓸쓸한 연애 백사장 입구 철 지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얽매여 군데군데 찢겨진 채였다 기어이 그녀는 바다에 와서 울었다 버려진 슬리퍼 한 짝과 라면봉지, 둥근 병 조각조차 추억의 이정표였을까 해질 녘 바위에 앉아 캔맥주 마개를 뜯을 때 들리는 파도소리, 벌겋게 취한 것은 서쪽으로 난 모든 창들이어서 그 인력권 안으로 포말이 일었다 유효기간 지난 플래카드처럼 매여 있는 것이 얼마나 치욕이냐고, 상처의 끈을 풀어준다면 금방이라도 막다른 곳으로 사라질 것 같은 그녀 왜 한줌 알약 같은 조가비를 모아 민박집 창문에 놓았을까, 창 모서리까지 밀물 드는 방에서 우리는 알몸을 기댔다 낡은 홑이불의 꽃들이 저녁내 파도 위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그녀가 잠든 사이, 밖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 2019. 8. 20.
신발을 잃다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는데 신발이 없다 눈 까뒤집고 찾아도 도망간 신발 돌아오지 않았다 돈 들여 장만한 새 신 아직도 길도 들이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모습 감춘 것이다 타는 장작불처럼 혈색 좋은 주인 넉살 좋게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 누군가 버리고 간 다 해진 것 대충 걸쳐 문밖 나가서려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그러잖아도 흥분으로 얼얼해진 뺨 사정없이 갈겨버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구멍난 양심에 있는 악담 없는 저주 퍼부어대도 맺혔던 분 쉬이 풀리지 않는데 어느 만큼 걷다보니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서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방통하지가 않다 그래 생각을 고치자 본래부터 내 것 어디 있으며 네 .. 2019. 7. 11.
산을 배우면서.. 산을 배우면서부터 참으로 서러운 이들과 외로운 이들이 산으로만 들어가 헤매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 느껴질 때는 이미 그것들 저만치 사라지는 것이 보이고 산과 내가 한 몸이 되어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 잊어버렸을 때는 머지않아 이것들이 가까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집과 사무실을 오고 갈 적에는 자꾸 산으로만 떠나고 싶어 안절부절 떠나기만 하면 옷 갈아입은 길들이 나를 맞아들이고 더러는 억새풀로 삐져나온 나뭇가지로 키를 조금 넘는 조릿대 줄기로 내 이마와 뺨을 때려도 내맞는 즐거움 아름답게 살아남았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오르락내리락 더 흘릴 땀도 말라버려 주저앉을 적에는 어서 빨리 집으로만 가고 싶었다 산을 내려가서 막걸리 한 사발 퍼마시고 그냥 그대로 잠들고만 싶었다 이렇게 집과 산을.. 2019.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