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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해장국집 비 오다 그친 날, 슬레이트집을 지나다가 얼굴에 검버섯 핀 아버지의 냄새를 맡는다 양철 바케쓰에 조개탄을 담아 양손에 쥐고 오르던 길 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언 손으로 얼굴 감싸쥐어도 겨울 새벽은 쉬 밝아오지 않고, 막 피워낸 난로 속 불꽃은 왜 그리 눈을 맵게 하던지 닫힌 문 작은 구멍마다 차가운 열쇠를 들이밀면 낡은 내복 속 등줄기를 따라 식은 땀 뜨겁게 흘러내렸다 한달치 봉급을 들고 아들이 돌아오면 아버지는 마른 정강이를 이끌고 해장국집으로 갔다 푹 들어간 눈 속으로 탕 한 그릇씩 퍼담던 오후 길 끝 당산나무에 하늘 높이 가슴치는 매미 울음소리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껴안을수록 멀어지는 세상 우산도 없이 젖은 머리칼을 털며 서창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습기 찬 구름 .. 2018. 1. 24.
가난한 사랑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Bill Douglas - Under The Moon 2018. 1. 18.
달콤한 인생 정용길화백의 겨울밤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 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 밤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설탕을 타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손목에 내려 앉아 마음을 어지럽히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 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 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보듯이 어머니는 젖은 눈으로 흰 눈, 흰 눈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초저녁 아버지의 제삿상을 물린 끝에 맞이한 열다섯 겨울 첫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는 다가올 첫사랑을 기다리며 첫눈 내리는 날이면 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 속에서 늘 눈막걸리 냄새가 납니다 권현형 Asha ~ Heal your heart 2018. 1. 15.
고목을 보며.. 천태산 영국사의 은행나무 그 많던 꿈이 다 상처가 되었을 게다 여름 겨울 없이 가지를 흔들던 세찬 바람도 밤이면 찾아와 온몸을 간질이던 자디잔 별들도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게다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 꽃보다도 또 열매보다도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인데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신경림 ♬ When Angels Smile - Back to Earth 2017. 12. 17.
너를 보내고.. 너를 보내고 또 나를 보낸다. 찬바람이 불어 네 거리 모서리로 네 옷자락 사라진 뒤 돌아서서 잠시 쳐다보는 하늘 내가 나를 비쳐보는 겨울 하늘 나도 사라져간다. 이제부터는 나의 내가 아니다 너를 보내고 어거지로 숨쉬는 세상 나는 내가 아닌 것에 나를 맡기고 어디 먼나라 울음속으로 나를 보낸다 너는 이제 보이지 않고 나도 보이지 않고 이성부 ♬ It's a Lonesome Old Town - Sting 2017. 12. 7.
같이 걷고 싶은 길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 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 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늙그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다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 2017. 10. 25.
시월 고창 문수사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위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로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뿐이어서 당신 이름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가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영혼의 눈물 (Scat 서리은) - 물병자리 OST 2017. 10. 11.
시월은 또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시월의 맑고 쓸쓸한 아침들이 풀밭 위에 내려와 있다 풀들은 어디에도 아침에 밟힌 흔적이 없다 지난 밤이 넓은 옷을 벗어 어디에 걸어 놓았는지 가볍고 경쾌한 햇빛만이 새의 부리처럼 쏟아진다. 언제나 단풍은 예감을 앞질러온다 누가 푸름이 저 단풍에게 자리를 사양했다고 하겠는가 뜨거운 것들은 본래 붉은 것이다 여윈 줄기들이 다 못 다독거린 제 삶을 안고 낙엽 위에 눕는다 낙엽만큼 쓸쓸한 생(生)을 가슴으로 들으려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 나뭇잎들이 몸을 포개는 기슭은 슬프고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흘러 가버릴 것들, 부서질 것들만 그리워해야 한다 이제,나무들이 푸른 이파리들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 때이다 새들과 들쥐들이야 몇 개의 곡식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망각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 기억은 밀폐된 곳일수록 조밀해진다 이.. 2017. 10. 11.
늙은 억새의 기도 꽃처럼 향기는 없지만 무르녹을 그늘도 없지만 이 가을에는 바람 부는 언덕에서 들풀로서의 삶을 다함없이 이루도록 지켜주옵소서 버려야할 마음을 버리지 못해 가식으로 하늘 향해 무릎을 꿇었으며 시새워 욕심의 칼날을 세웠던 지난 날들의 죄를 고백하오니 사랑의 주님 용서해 주옵소서 아름다운 꽃들을 증오하지 않겠습니다 곱게 물드는 잎새들도 부러워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 영혼의 불을 밝히고 싶습니다 작은 지혜와 노력으로 삼복염천을 버티며 익힌 나의 눈물겨운 분신들을 거친 바람결에 딸려보내오니 부디 당신께서 소용되는 곳에 써 주옵소서 박해옥 ♬ BEE GEES - SAVED BY THE BELL 2017.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