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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대한 명상

by 류.. 2020. 7. 20.

 

 

    나는 가끔 장마 끝에 열리는 푸른 하늘을 보며

    구름의 흐름을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가다가 때로 멈추는 것이 구름이라면

    흐르다가 때로 멈추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구름이 아름다운 것은 제 몸을 자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짓고 허무는 데 자유자재한 구름을 나는 때로

    우아한 하늘 경작자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구름의 사진을 찍고 싶은 이여

    구름의 사진을 찍지 마라

    아까의 구름은 지금의 구름이 아니다

    끝없이 흘러가면서 학교도 짓고 우체통도 만들고 목화꽃도 피우다가

    그것마저 심심해지면 하늘에게 온 몸을 맡기고

    저 자신은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구름

 

    나는 열 살 때는 논두렁에 서서 구름을 바라보았고

    마흔 살에는 교실의 창문 틈으로 구름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햇살이 풍금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내 방 창문을 통해

    느린 기차처럼 가고 있는 구름을 보고 있지만

    저렇게 느리게 가는 기차라면 나는

    세수도 좀 하고 양복도 꺼내 입고 구두도 갈아 신고 천천히 걸어가서도

    충분히 기차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자주 글썽이는 볼펜으로 구름에 대한 명상을 쓰고 있다

    글썽인다는 말은 얼마나 애잔하고 아름다운가

 

    나는 본래 작고 여리고 슬픈 것을 사랑한다

    내가 만일 애인을 택한다면 나는 자주 글썽이는 애인을 택하리라

    채송화 꽃잎에도 글썽이고 고추잠자리에도 글썽이는 애인

    미모사같이 자주 잎을 오므리고 연잎같이 그리움을 펴는 애인

    눈시울에 추억을 매달고 있는 애인

    구름처럼 떠나갔다가 소낙비 같이 찾아오는 애인

    떠날 때의 발자국 소리가 대문간에 조약돌처럼 남아 있는 애인

 

    구름을 바라보며 나는 기다림을 배웠고

    기다림이 참음이라는 것을 배웠다

    나는 지금도 책꽂이의 책처럼 서서 기다리며

    기다림이 설탕이 되어 내 몸 속을 파고드는 긴장을 좋아한다

 

    나는 가끔 구름은 햇빛이 타고 다니는 마차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늘 바쁜 햇빛은 제 몸을 쉬고 싶을 때

    구름의 그네에 앉아 쉴 거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상일 궁금하면

    무지개의 사닥다리를 놓아 땅으로 내려올 거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우리는 지붕처럼 아프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도랑물처럼 노래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방랑이 아름다움임을 가르친 구름이여

    보는 것은 모두 수채화이던 때가 있었다

    듣는 것은 모두 음악이던 때가 있었다

    음악을 만나도 사랑하고 싶던 때가 있었다

 

    물 속에 잠기는 돌멩이처럼

    책 속에 몸이 잠기는 소년을 지나

    지식이 감성을 누르는 청년을 지나오면서

    나는 구름을 쳐다보는 일을 오래 잊고 지냈다

 

    지금도 지하철을 타고 가며 생각의 풍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렇게 몸이 부드러운 구름을

    혼자 보고 있는 내가 미안해진다

    묶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저 푸름과 저 부드러움을

    시계를 보며 햇볕 없는 곳을 달리는 그들에게 부쳐 주고 싶다

 

    영원히 주소가 없을 구름이여

    나는 너 때문에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한 끼 수저질에도 바빠했던 나날을 되돌아보며

    이제 너의 무심을, 무심의 한 조각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를 스승이라 부르겠다

 

 

 

    이기철

 

 

  

  Asher Quinn - Canzone Ange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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