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길 달려 고향에 온 섣달 그믐밤이었지요
오래 참고 왔던 요의尿意를 풀기 위해 뒤란의 늙은 감나무 아래서 부끄럼도 없이 아랫도리를 내놓았는데요.
오랜 그리움으로 오촉 전구알 같은 홍시 하나 달고 하늬바람 속에 서 있던 감나무가 흠칫, 잔가지들을 바르르
떨더라고요. 일순 감꽃처럼 눈부시게 머리 위로 쏟아지는 요요耀耀한 별빛들이라니! 불현듯 감나무에게 죄송
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랫도리 부르르 떨렸지요.
새 집을 지으면서 어머니가 함께 심은 성주 같은 감나무인데 고작 지린내 나는 오줌발이나 갈기다니, 에끼 호로
자석 같으니라고! 누군가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것만 같아 얼른 아랫도리를 추스르고 돌아서는데, 글쎄,
정지문 열고 선 칠순 노모께서 ‘아야, 거기서 뭐 하냐’하시는데, 그냥 ‘별빛이 하도 좋아서라우’ 시치미는 땠지
만, 섣달 그믐 요요한 별빛 아래 서 계시는 어머니의 굽은 등이 그날따라 왜 그리도 늙은 감나무를 닮았던지.
내 어릴 적에는 그 감나무 그늘 아래서 감꽃을 주어먹으며 자랐지요.
철없이 행복했던 시절이 가고 철들어 객지를 떠돌면서부터 어느 해에는 ‘단감이 참 많이도 열었어야’ 또 어떤
해에는 '올해는 단감나무가 해거리를 하는가 보다’ 어머니가 감나무의 안부를 전할 때마다 바쁘다는 핑계로 더
큰 일거리를 쫓아다닌다는 명분으로 늘 어머니의 말씀을 한 귀로 흘리며 살았지요. 어린 손자들 간식거리라도
하라며 비료포대에 단도리해서 보내주신 주먹만한 단감을 깎아 먹으면서도 나는 정작 그 감나무를 생각한 적
이 없었지요. 감나무의 안부를 전하는 어머니의 깊은 속내도 어릴 적 내 동무 같던 감나무에 대한 추억도 아예
잊고 살았지요. 그런데 섣달 그믐밤 아랫도리를 추스르다 말고 어머니에게 들킨 순간, 그 감나무가 마치 나를
반기는 피붙이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기껏 어둠 속에서 지린내 나는 오줌 한 줄기 밖에 줄게 없었
는데, 감나무는 내가 오래 잊고 살았던 내 생의 뿌리를 다시 들어올려 주었던 것이지요.
참으로 감나무에게 속죄하고 싶은 밤이었지요.
김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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