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길거리에서 나에게로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때가 있다.
12월.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종종걸음을 치고 길가에도 시장에도 지하도에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아진 사람들의 떼가
이리저리 밀려가고 흘러간다.
"대체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나는 때때로 그런 것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흔적없이 스며들고 들끓던 거리가
비고 두려운 적막이 깔리게 된다.
다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내내 고독하여..."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읊어본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그가 말한 '집'은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단순한 육신의 은신처, 외계로부터 분리된
육면체의 공간을 말함인가? 아니 더 발전시킨다면 그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상징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이 언제인
가는 돌아가야 할 영원의 안식처인가? 그러나 이들 중 그 어느 것이라 하여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나는 우선 지상에 있는 도회의 변두리. 내 집으로 날마다 어김없이 돌아간다.
12월의 거리에서 나서면 나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나로부터
뻗어나간 아픈 인연과 핏줄, 진하게 공명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눈물겹다. 그들은 나의 얼어 있는 손발과 마음을 녹여
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부유하게 한다.
12월의 거리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그 추위에 못지 않은 폐쇄성과 단절감과 외로움이다. 집집마다 문들이 굳게 닫혀 있다.
그들은 좀처럼 그 문을 열 것 같지 않다. 모두들 달팽이처럼 굳은 껍질 속에 몸을 움츠리고 안으로만 응축해 들어가는 계절,
감히 누구를 향해서도 손을 내밀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12월이면 나는 언제나 집쪽으로 집쪽으로 나의 활동반경을 축소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자기를 엄중하게 응시하고 성찰하고 정돈하는 데에 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그래서 창문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덜컹거리고 난로 위에 얹어 놓은 주전자의 물이 끓으면 나는 불가에
앉아 잠시 아련한 평화에 싸인다. 그 뜨거운 물이 목줄기를 타고 내려갈 때 나는 간절한 생명의 감각을 실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때 곧잘 안델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생각한다. 불이 당긴 성냥개피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환상의
날개를 달아 절규도 없이 조용히 죽어간 소녀를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이 있고 따뜻한 웃음이 있고 다정한 가족이 있는 집.
불이 켜진 창안의 행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는 죽었다.
어느 누구도 그가 떨고 서 있는 문밖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절대의 무관심. 절대의 소외 속에 무섭게 견디다가 그는 죽었다.
그러나 그 소녀는 타인의 냉담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처지를 넉두리하지 않았다.그는 어느 집의 문
도 흔들거나 두드리지 않았다. '저 불 겨진 창안의 사람들은 아름답구나. 황홀하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12월에는 대문을 반쯤 열어두고 가끔가끔 밖을 내다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영접을 기다리던 지극히 작은 자가
지쳐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우리집 대문 앞이나 골목의 처마 밑에 오돌오돌 떨고 있을지도 모르는 소녀.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하여 나는 잠시 웃음을
멈추고 문밖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밖을 내다봐야 한다. 아, 이 추위 속에 방안에서 뜨거운 물을 마실 수 있는 축복이 벅차다
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릴 수 있는 축복은 절대분량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절대분량의 축복을 내게 내리기 위하여 어느 누구를
제외하고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고통은 클 것이다.내가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느 누군가의 행복, 이
빚을 갚기 위하여 묵상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냥팔이 소녀의 순수무구한 영혼에 비하면 일년 열두 달 이렇노라,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나의 공전이 부끄럽다. 당치도
않은 욕망과 치졸한 분노와 성급한 절망. 이런 것들은 얼마나 안이하고 엉뚱한 것이었는가. 나는 내게 내려진 축복을 얼마
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며 방자히 굴었던가?
나는 내 주인이 맡긴 두 달란트가 적다고 투정이나 했을 뿐이다. 남이 받은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만 넘겨다 보며 불평
하였다. 내가 받은 것을 늘려 주인의 빚을 갚고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칭찬 받을 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였다.
동록이 슬은 나의 두 달란트, 내 주인의 은혜를 저버린 외면, 나는 심판과 결산의 12월에야 이것을 뉘우친다. 녹슨 돈을
돌려 줄 때 내릴 내 주인의 진노가 두렵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한없이 한없이 왜소해진다.
나는 12월이면 놓쳐버린 시간과 비로소 대면하게 된다. 시간의 일회성과 순환의 유구성에 대하여 깨닫는다. 언제나
뒤늦게 뒤늦게서야 세상 일에는 제각기 알맞은 때가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마치 흘러간 여울물이 하류에서 더 넓은 강폭이
되어 거세지듯이 내가 소홀히 놓쳐버린 시간은 나중에 더 무서운 기세로 나를 따돌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봄철에 한가했기
때문에 여름에도 김맬 땅이 없으며, 가을에 역시 갇어들일 곡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참회하는 것이다.
지금 바람벽에 펄럭거리는 한 장의 달력. 그 속에 담긴 설경이 한없이 삭막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거기 눈썰매의
그림이 가난한 도피의 행장처럼 초조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달력을 처음 걸어 둘 때의 당당하던 기세. 뻗쳐오르던 소망, 흥분으로 설레이던 가슴이 부끄러워진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년의 길이. 그 무심한 잠적이 원망스럽다.
12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그 남은 며칠 동안을 묵은 노우트의 뒷장처럼 함부로 구기박질러 버릴 수는 없다. 비장해 두었던
내 진실의 에너지를 이 해의 마지막 절정 위에 꽃가루처럼 뿌려야겠다. 닫힌 문밖으로 높은 울타리 너머로 훈훈한 손길을
흔들어야겠다.
아니, 어서 서둘러 문부터 열어야겠다.
이향아
♬ God Be With You Till We Meet Again/Patti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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