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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가을까지 온 것들..

by 류.. 2013. 10. 1.

 

 

 

 

          구절초 꽃의 보랏빛 향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잠자리가
          대추나무 가지로 옮겨 앉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로 나뭇가지를 잡으며 대추나무에게
          미세한 잎맥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네 개의 날개 끝에 있는 단아한 고동색 무늬가 곱습니다.
          잠자리 몸의 아름다운 색깔들은 누가 칠해놓았는지
          참 잘도 그리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작은 한 마리의 잠자리도
          기나긴 장맛비의 회초리를 다 견뎌냈습니다.
          뜨거운 햇살의 시간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귀뚜라미 몇 마리가 언제 숨어들어 왔는지
          욕실 구석에 살림을 차린 뒤
          몰래 새끼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가늘고 긴 더듬이를 뻗어 소리를 내 보낼 방향을 가늠하더니
          저녁이면 숲으로 긴 편지를 찍어 보내느라 골똘합니다.

           

          귀뚜라미 가족도 천둥과 번개의 시절을 다 지나왔습니다.
          그 크고 두려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새끼들을 보듬어 안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당가의 물봉선, 원추리, 배롱나무, 청죽, 질경이도
          쏟아지는 빗줄기를 다 이겨냈습니다.

          번개가 날카로운 칼날로 팽나무 가지 끝에서
          뿌리까지 훑고 지나갈 때,
          흰색 보라색 도라지꽃들도 꽃부터 뿌리까지 찢어질 듯
          뜨거운 불칼을 맞으며 견뎌냈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뿌리로 땅을 움켜잡고
          질렀던 소리 없는 비명을 가을바람은 알고 있습니다.

           

          뿌리가 견딜 때 열매들도 똑같이 견뎠습니다.
          대추나무의 작은 대추알들도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대추나무 가지와 대추알을 연결하는 꼭지는
          가늘고 짧고 작습니다.

          폭풍이 온몸을 흔들어 댈 때마다 대추알을 지키느라
          꼭지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대추보다 몸이 큰 푸른 감과 둥근 사과와 배는 제가 키워온
          제 무게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시간을 지나 지금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꽃과 나무와 곤충들이 대견합니다.

          한 알의 과일은 그냥 저절로 자란 과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견디고 이겨내 지금 완성을 향해
          과육을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송이 가을꽃은 그냥 꽃이 아닙니다.
          청초한 빛깔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폭풍과 장맛비와 폭염속에서 올린 절절한 기도가
          우리가 마시는 맑은 공기속에 신선하고 뜨거운 기운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 도종환 시인의 편지 중에서-

           

           

           

 

  

 

      The Last Rose of Summer /Joan Suth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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