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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323

사랑은... 이번 어느 가을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 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 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해졌습니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 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이병률의 산문집,중에서 2009. 11. 14.
11월 11월의 태안 신두리해수욕장 이제 바다를 찾아가 보자 바닷가에 가면 우선 손님이 한 명도 없는 적막한 호텔이나 여관의 방을 빌려 보라 방이 스무 개나 서른 개 혹은 그 이상 있는 건물에 완전히 혼자 있게 되면, 거의 유령이 나올 듯한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거다 방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부지불식간에 후딱 가버린, 지난 여름날의 이야기들이나 겪었던 일들을 느끼고 생각해 보라 마치 그 자리에 다시 서 있는 것처럼... 아, 나는 그 시절 얼마나 오만했으며, 슬프거나 외로웠던 일들은 또 얼마나 많았고, 기쁜 일은 또 얼마나 되었던가! 아, 거짓된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랑의 맹세를 했으며, 또 얼마만큼 진실되게 사랑을 약속했던가! 아,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더불어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울려오는구나! 아, 그 시.. 2009. 11. 3.
가을은...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들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2009. 9. 25.
가을 자유가 그리워 여행을 떠났다가 보고픈 사람이 있는 내 집이 그리워져 돌아오는 길에 오동나무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오동나무에서 오동잎 하나 떨어지는데, 눈물만큼 한 참 뜸들이다 떨어지더군요. 아프지 않은 이별이 없듯이 아프지 않은 영혼은 없더군요.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조용히 노래했지요. 그 노래 소리에 먼저 무너지는 것은 저 자신이었고요,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순한 짐승은 모두 그러했습니다. 가을을 타고 있었지요 별만 보고도 아파하고 꽃이 피는 것만 보고도 아파하는 순한 짐승이었습니다. 이별만 아픈 줄 알았더니 봄이 초록으로 일어서는 그 날에도 아파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결국 사람은 늘 아파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오동잎 하나 떨어지는 풍경에 용기 내어 한 발 슬쩍 사람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 2009. 9. 20.
夢山浦 日記 그대와 함께 걷는 길이 꿈길 아닌 곳 어디 있으랴만 해질 무렵 몽산포 솔숲 길은 아무래도 지상의 길이 아닌 듯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참으로 아득한 꿈길 같았습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 좋았던 나는 순간순간 말을 걸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 속마음 서로가 모르지 않기에. 그래, 아무 말 말자. 약속도 확신도 줄 수 없는 거품뿐인 말로 공허한 웃음짓지 말자. 솔숲 길을 지나 해변으로 나가는 동안 석양은 지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운 낙조를 보며 그대는 살며시 내게 어깨를 기대 왔지요. 함께 저 아름다운 노을의 세계로 갈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가 그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대는 그저 쓸쓸한 웃음만 보여 줬지요. 아름답다는.. 2009. 8. 4.
이런 남자 친구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남자 친구 하나쯤 갖고 싶다. 여자 친구보다는 이성의 분위기가 풍기면서 그러나 애인보다는 단순한 감정이 유지되는 남자 친구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여자 친구보다는 용모에도 조금은 긴장감을 느끼고 애인보다는 자유로운 거리감을 둘 수 있는 남자친구가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너무 자주는 말고 가끔은 내게 전화를 해서 건강도 묻고 가족의 안부를 물어주며 혹간은 너는 아직도 아름답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남자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어쩌다가 월급 외의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를 떠올려 무얼 사줄까 물어 준다면 더욱 기쁠 것 같다. 날씨의 변화에도 민감해서 비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 문득 거리를 걷다가 공중전화에 들어가 내게 전화해 주는 관심이 있는 남자. 그런 남자 친구라면 내게 아직도 친구가 있다는 .. 2009. 7. 30.
다시 강으로 가고 싶다 오늘은 하루 종일 가슴 저 밑에서 출렁이는 강물 소리를 들었다. 내 가슴을 흔들고 내 몸을 흔들다가 강가 모래톱 어딘가에 나를 부려놓고 흘러가는 강물 소리. 온종일 젖어 있다가, 온종일 설레게 하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잔잔해진 강물 소리. 얼굴을 한쪽으로 젖힌 채 따뜻한 돌멩이를 갖다대고 톡톡 두드리면 귓속에서 쪼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강물 소리. 그 강줄기 위에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꽃잎처럼 띄워놓고 천천히 따라 내려가고 싶다. 따뜻한 모래밭에서 사랑하는 이의 무릎을 베고 누운 듯 편안하게 누워 잠시 잠이 들고 싶다. 눈을 감고 풀잎을 스치는 소리처럼 들려오는 그의 말소리를 듣고 있고 싶다. 그 말을 해본 지가 언제인지 너무도 오래된 사랑한다는 말을 강물 소리 곁에서 다시 하고 싶다. 강으로 가.. 2009. 7. 21.
치자꽃 설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 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 2009. 7. 11.
살아있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요즘은 세상에 재미있는게 없어'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면서 어색하게 웃고만 있다. 장난감 하나로 마음껏 행복해질 수 있었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행복해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행복이 뭔지도 몰랐지만 행복했던 때였다. 나는 생각을 최대한 단순화시키려고 애를 쓴다. 과거의 추억은 씁슬하고 현재 일상은 지루하지만 그래도 지푸라기 같은 행복의 끝자락은 어딘가에 있을거라고 믿어본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과 재미있은 책과 좋은 음악과 보고싶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친구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좋잖아?' 나는 그 친구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속삭인다. '살아있으니까' -황경신의[Paper]중에서 2009.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