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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323

한때 우리는 모두가 별이었다 모든 인간은 별이다 이젠 모두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지만, 그래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고 누구 하나 기억해내려고 조차 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건 여전히 진실이다 한때 우리는 모두가 별이었다. 저마다 꼭 자기 몫만큼의 크기와 밝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채, 해 저문 하늘녘 어디쯤엔가에서, 꼭 자기만의 별자리에서 자기만의 이름으로 빛나던, 우리 모두가 누구나 다 그렇게 영롱한 별이었다 그러나 한때 별이었던 사람은 우리들만이 아니다. 이 땅을 찾아와 살다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우리들의 지구를 떠나버린 사람들 그리고 머잖아 태어날 사람들 혹은 아직 차례를 기다리며 아득히 먼 미래의 정거장에서 눈을 두리번 거리며 앉아 있을 수많은 미지의 얼굴들 그들도 모두가 별이었다 행여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 2009. 5. 24.
사랑할 수 없는 자 < 오늘 오후에 백화점에 들를 일이 있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누군가 무심히 내 목발을 건드려서 넘어지게 될까 봐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런데 한 구석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딸인 듯 보이는 네다섯 살 난 어린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아이는 무슨 일인지 막무가내로 떼를 쓰면서 울고 있었다. 그 때 마침 나를 발견한 그 여자는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저봐, 에비 에비, 너 계속 울면 저 사람이 잡아간다,”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아이는 순식간에 울음을 그치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여자는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아이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황당한 경험이었다. 물론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지만, 그냥 호기심일 뿐, 우는 아이도 당장 그치게.. 2009. 5. 9.
그대여 낚시를 하라 삶의 소중함을 알고 흐르는 시간의 강물 속에 인생도 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거든 그대여 낚시를 하라 오랜 침묵으로 사유의 늪에 빠지고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오랜 기다림의 희열을 맛보고 싶거든 그대여 낚시를 하라 낚싯대에 걸리는 손맛의 짜릿함을 알고 흐르는 물 속에서 움.. 2009. 5. 5.
민들레 뿌리 날이 가물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때가 되면 햇살 가득 넘치고 빗물 넉넉해 꽃 피고 열매 맺는 일 순탄하기만 한 삶도 많지만 사는 일 누구에게나 그리 만만치 않아 어느 해엔 늦도록 추위가 물러가지 않거나 가뭄이 깊어 튼실한 꽃은 커녕 몸을 지키기 어려운 때도 있다 눈치빠른 이들은 들판을 떠나고 남아 있는 것들도 삶의 반경 절반으로 줄이며 떨어져나가는 제 살과 이파리들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겉보기엔 많이 빈약해지고 초췌하여 지쳐 있는 듯 하지만 그럴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남들은 제 꽃이 어떤 모양 어떤 빛깔로 비칠까 걱정할 때 곁뿌리 다 데리고 원뿌리를 곧게 곧게 아래로 내린다 꽃 피기 어려운 때일수록 두 배 세 배 깊어져간다 더욱 말 없이 더욱 진지하게 낮은 곳을 찾.. 2009. 4. 19.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그 외로운 봉우리와 하늘로 가야겠다. 묵직한 등산화 한 켤레와 피켈과 바람의 노래와 흔들리는 질긴 자일만 있으면 그만이다. 산 허리에 깔리는 장미빛 노을, 또는 동트는 잿빛 아침만 있으면 된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혹은 거칠게 혹.. 2009. 2. 14.
혼자 떠난 여행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혼자 떠난 여행의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이 生에서의 외로움을 끌어안을 수 있다.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 그 목소리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 자신이 택한 길의 풍경을 진심으로 만나게 되는 것, 그 풍경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주 먼 옛날, 누군가의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 -황경신, 중에서 2009. 1. 20.
너희사랑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노래/신경림 너희사랑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2009. 1. 12.
추억의 아주 먼곳 세상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다던 여자가 있었다. 태양이 없는 나라. 시간이 얼어붙은 나라. 불빛도 인기척도 없는 나라. 그녀는 하필이면 왜 그런 곳에 가고 싶어했을까. 도대체 어디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던 걸까. 헤어지기 전에 물어둘 걸 그랬나 보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지금에 와서 나는 누구에게도 그걸 물어볼 수가 없다. 당신은 가끔 그랬었지. 푸른 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은빛 날개를 보고 있으면 미쳐요, 라고. 그래, 나도 삼나무 짙은 그늘 속을 헤매다 가끔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그땐 나도 귀가 멀어버리는 줄 알았지. 아주 어렸을 때야.... 그래,때로 먼지 낀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낮달처럼 조용히 떠 있.. 2009. 1. 11.
거슬러 오른다는 것 나뭇잎들은 왜 강아래로 내려 가지요? 은빛 연어가 신기해 하면서 묻자 "그건 거슬러 오를 줄 모르기 때문이야!" 하고, 초록강이 말했다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또 뭐죠?"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 같은거 말이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란다 -안도현의 동화 '연어' 중에서 2008.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