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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너희사랑

by 류.. 2009. 1. 12.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노래/신경림
	
 

 

 

 

 

너희사랑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류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이전에 〈너희 사랑〉이라는 시가 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신경림(73) 시인이 막 50대 초반에 들어섰을 때다  시인이 자주 가던 식당에 청초하고 어여쁜 처녀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처녀가 시인에게 면담을 청하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가 신경림 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한다며 한번 만나달라는 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인에게 어렵게 청을 넣은 이 식당 따님의 마음이 어여뻐 시인은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두 남녀는 머지않아 부부 연을 맺었다. 그때 시인은 두 사람을 축복하며

〈너희 사랑〉이라는 시를 지어 결혼식에서 읽어주었다.

결혼식은 컴컴한 반 지하 방에 열 명 남짓 모여 단출하게 치러졌다. 노동운동을 하던 남자가 수배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너무도 행복해하는 이 어여쁜 청춘 남녀에게 〈너희 사랑〉을 선물한 후

이들을 생각하며 또 한편의 시를 썼으니 그것이 〈가난한 사랑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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