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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사랑할 수 없는 자

by 류.. 2009.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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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 백화점에 들를 일이 있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누군가 무심히 내 목발을 건드려서 넘어지게 될까 봐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런데 한 구석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딸인 듯 보이는 네다섯 살 난 어린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아이는 무슨 일인지 막무가내로 떼를 쓰면서 울고 있었다.

그 때 마침 나를 발견한 그 여자는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저봐, 에비 에비, 너 계속 울면 저 사람이 잡아간다,”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아이는 순식간에 울음을 그치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여자는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아이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황당한 경험이었다. 물론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지만, 그냥 호기심일 뿐, 우는 아이도
당장 그치게 할만큼 그렇게 가공할만한 괴물처럼 보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내 모습에 ‘공포’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아마도 이제 그 아이는 앞으로 신체장애인을 보면 자연스럽게
‘무서운 사람, 내게 해코지를 할 사람’을 연상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신체 장애에 악이나 공포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는 미디아뿐만 아니라 문학이 큰 역할을 했다.
어렸을 때 읽는 동화에서 ‘악당’들은 대부분 신체적으로 모종의 결손이 있거나 ‘정상’이 아닌 모습을 하고 있다.
'헨젤과 그러텔’에 등장하는 마녀는 다리를 절고, 럼펠스틸스킨은 난장이이고, ‘보물섬’의 실버는 나무다리에 애꾸눈,
'피터팬’의 악한 캡틴 훅은 외팔이이다. 소위 ‘정전’에 속하는 문학작품에서도 이런 전통은 계속된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래뼈 의족을 한 ‘백경’의 에이헤브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셰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도
유명하다. 실제 역사상의 리차드 3세는 장애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그의 악한 성향에 맞춰 조산으로 인해 추하고 몸이 비꼬인 기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기형이고 미완성이고, 반도 만들어지지 않은 채/ 너무 일찍이 이 생동하는 세계로 보내져/ 절뚝거리고 추한
나의 모습에/개들도 짖는다/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을 즐기는/사랑하는 자가 될 수 없기에/ 나는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1막 1장).

얼마 전 어느 대학신문 컬럼의 제목은 ‘절름발이 지성’이었고, 사설에서는 정부시책을 비난하면서 '곱사등이 정책’
이라는 말을 썼다. '벙어리 삼룡이’ '백치 아다다’는 가난과 불운, 비참과 우둔의 상징이고, 언젠가 읽은 논문에 의하면
우리문학에서 장애인의 직업은 걸인, 식모, 하인, 점장이등, 하류계급층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때는 반대로 장애에 극단적인 ‘선’의 의미가 부과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어리석을 정도로 순수한 사랑의 주인공 노틀담의 곱추, 코주부 시라노 드 벨쥐락이 생각나고, '크리스마스 캐롤’의
티미도 있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은 어느 장애인공동체를 방문하고 나서

"장애인들이라 그런지 해맑고 천사 같다'고 말했다. 악을 행하기 위해 돌아다닐 여건이 안되어서 그렇지 장애인이라서
천사 같을 리는 없는 노릇이다.

신체장애는 단지 의학적 케이스일 뿐, 악이든 선이든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몇 년 전 없는 재주로 무리해서 수필집을 낸 적이 있다. 가끔씩 방송이나 신문에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1급장애 여교수의 인간 승리, 치열한 삶” 등등으로 요약된다.




 




불가피하게 나의 장애에 관해 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의도는 '장애인 장영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삶의 장애를 갖고 있는 '인간 장영희’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삶은
별로 '치열한’ 것 같지 않다. 아니, 내 삶이 치열하고 감동스럽다면 난 이제껏 치열하고 감동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어차피 인생은 장애물 경기가 아닐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고, 장애물 하나 뛰어 넘고
이젠 됐다,

안도의 한숨 몰아쉴 때면 생각지도 않았던 또다른 장애물이 나타난다. 그 장애가 신체 장애이든, 인간관계 장애이든,
돈이 없는 장애이든, 돈이 너무 많은 장애이든 (꼭 총리가 되고 싶었던 두 총리 후보자에겐 그것도 분명히 장애였다),

아무리 권력있고 부를 누리는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왜 유독 신체장애에만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

나도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날 ‘사랑할 수 없는 자’로 만들어버린 '아까 그 여자'에 대한 나의 궁색한 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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