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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323

모항에 갔다 아무 생각없이 모항에 갔다 사는 게 시들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지기도 하고 그런 염세적인 이유를 일부러 만들지 않고도 문득 서해 바다가 보고 싶거나 그곳의 낙조가 보고 싶다거나 혹, 우연히 옛사랑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만으로도 떠날 수 있는 인생의 어떤 가벼운 날들이 있다 덜컹거리는 야간 완행열차도 아니고 호젓한 나 홀로의 잠행도 아니고 사람들 속에 섞여 관광버스를 타고 무색무취하게 아무 생각도 없이 모항에 갔다 바닷물은 멀리 빠져나가고 불편한 심사를 감춘 늙은이처럼 모항은 갯벌 위에 흰 뼈같은 몇 척의 배들을 간신히 붙들어 두고 있었다 저도 허전하고 두려웠던 것일까, 모항은 밤새 굵은 비를 뿌려 영혼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허겁지겁 채우고 있었다 청솔민박집에 누웠으나 개펄을 두드.. 2010. 9. 17.
가을 하늘 같은... 마음 속에 맑은 거울을 하나 갖고 싶다. 맑아서 눈물이 돌고 그리워서 사무치는 가을 하늘처럼 깊어졌으면 좋겠다. 얼마나 쉼없이 갈고 닦아야 가을 하늘처럼 될까. 들여다 보기만 하면, 미소가 퍼져 흐르고, 음악이 울려나올 수 있을까. 삶의 속기와 얼룩이 더덕더덕 묻은 거울을 깨끗히 닦아내고 싶다. 마음 속에 종을 하나 달아두고 싶다. 한 번 울리기만 하면 고통과 슬픔도 사라지고 마음 속으로부터 깊은 향기가 퍼져 나왔으면 좋겠다. 듣기만 해도 낭낭하고 은근하여서 마음의 문이 열리고, 신비음을 들을 수 있는 맑은 귀가 있었으면.... 어떻게 하면 양심의 종을 달아놓을 수 있을까. 일만 관의 허욕을 버리고 일만 관의 적선(積善)으로 종 하나를 만들 수 있다면, 한 관의 적선도 못 가진 나로선 이룰 수 없는 일이.. 2010. 9. 11.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같은 골목을 지나도 매일 같은 길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은 햇빛이 가득차 눈이 부시고 어느 날엔 비가 내려 흐려도 투명하거나 어느 날엔 바람에 눈이 내려 바람 속을 걷는 것인지 길을 걷는 것인지 모를것 같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골목 어귀 한그루 나무조차 어느 날은 꽃을 피우고 어느 날은 잎을 틔우고 무성한 나뭇잎에 바람을 달고 빗물을 담고 그렇게 계절을 지나고 빛이 바래고.. 자꾸 비워 가는 빈 가지가 되고 늘 같은 모습의 나무도 아니었습니다. 문밖의 세상도 그랬습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서고 저녁이면 돌아오는 하루를 살아도 늘 어제 같은 오늘이 아니고 또 오늘 같은 내일은 아니었습니다. 슬프고 힘든 날 뒤에는 비 온 뒤 개인 하늘처럼 웃을 날이 있었고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 뒤에.. 2010. 8. 27.
가만히 깊어가는 것들 가을이 와서 어느덧 깊어 가고 있습니다 깊어 가다니요. 어디로 깊어 간단 말일까요. 가을 나무들은 길었던 푸른 세월을 마침내 붉은빛으로 익혀서는 내면으로 들입니다 그리고는 긴 동안거冬安居에 임합니다. 마침내는 중심을 열어 청정한 나이테 하나를 얻습니다. 나무들은 그렇게 깊어지는데 우리들 인연의 여러 얽힘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깊어지는 걸까요 벌레들은 밤새워 고요 속에다가 갖가지 수를 놓는 듯 싶습니다. 처음엔 몇 필匹 될 듯싶더니 지금은 그저 손수건 한 장쯤에 짜는 모양입니다 그만큼 밤도 깊습니다. 밤이 깊으면 병인 듯 이런저런 먼 곳의 일들이 궁금해지곤 합니다. 먼 곳의 빛과 소리들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밤이므로 길을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저 창 앞을 서성이며 그렇게 그리워 할 뿐입니다. 어쩌면 그곳은 .. 2010. 8. 24.
우리는 단지... 우리는 단지 잠깐 쉬고 있을 뿐이다. 저무는 플랫폼 길은 영원으로 열려 있고 영원에 종점이란 없다 쉰다는 것은 이별과 만남의 교차, 달리는 순간엔 모두가 하나다 떠난 자를 미워마라 참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긴 터널과 외로운 가교 복사꽃 피는 마을도 있었지만 폭풍우 치는 밤이 더 많았다 이 세상은 승차와 하차로 이루어지는 평행선. 그 끝없는 레일을 달리며 우리의 이별은 만남을 다시 꿈꾼다 2010. 7. 3.
釣三樂 낚시를 하면 세가지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첫번째가 기다리는 즐거움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알기 때문에 가지는 기대감이며 희망입니다 비록 오늘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내일을 기대하는, 또 그 다음 내일을 희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기다림이란 좋은 것 입니다 그러나 낚시를 하는 동안 몇 시간동안 오지도 않는 입질을 보고 있노라면 견디기가 어려운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에 미끼를 너무 자주 갈아주며 자리를 옮기거나 잘 맞아있는 채비에 손을 대보고 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질 않읍니다 기다릴줄 아는 자만이 결실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기다릴줄 아는 자에게 곡식과 풍성한 먹거리로 보상을 합니다 그래서 낚시의 즐거움의 하나가 기다리는 재미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2010. 5. 13.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인가 고베, 아카시대교 누군가가 묻는다.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인가 라고. 언제나 어떤 완전한 힘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일상의 삶 속에 그대로 잠들어 있는 여러 가지 감성들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자극제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럴 때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몇 가지 진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고 싶어서 여행을 한다. 나는 그 감각들이 우리에게서 저 내면 의 노래를 흘러 나오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내면의 노래가 없다면 우리가 느끼는 그 어떤 것도 아무런 값어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중략)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여행은 그럴 때 하나의 수단이다. 예수회신자들이 육.. 2010. 4. 6.
나도 그러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였을까.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 손가락으로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 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 나도 그러했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비린 것을 눌러 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 저 혼자 삭아가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 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 2010. 1. 14.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 2009.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