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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323

차례차례 피는 꽃 어느 날 갑자기 피는 꽃은 없습니다 어떤 꽃이든 오랫동안 끊임없이 준비하면서 핍니다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그 꽃을 발견한 것뿐입니다 봄 들판에 여린 꽃다지 한 송이도 겨우내 준비한 뒤에 꽃송이를 내밉니다 오랜 날을 추위와 목마름과 싸워 오면서도 때가 되어야 꽃송이를 내밉니다 잿빛으로 죽어 있는 겨울 들판을 쉬지 않고 달려와 봄이 온 것을 제일 먼저 알리고 난 뒤 산수유꽃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걸 보면서 비슷한 크기, 똑같은 빛깔의 생강나무꽃이 덩달아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산수유꽃이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할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 비로소 꽃을 피웁니다 산수유보다 더 진하고 강한 향기를 지닌 줄기와 꽃을 키워 갑니다 진달래가 피었다고 해서 철쭉도 같이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제 차례가.. 2011. 3. 13.
귀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 2011. 2. 10.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돌은 매끈하고 어느 돌은 편편하다. 굴러 내린 돌, 금이 간 돌, 자갈이 되고만 돌도 있다. 아래쪽의 넓적하고 큰 돌은 오래된 것들이고 그것들이 없었다면 위쪽의 벽돌들 모양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어느 순간은 노다지처럼 귀하고 어느 벽돌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고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엄연히 내 인생의 한 순간이다. 그런데 이 성벽은 도대체 누가 쌓은 것일까. 순간이여, 알아서 쌓아라. 누구든 나를 대신해서 순간을 쌓아다오,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모른다.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 2011. 2. 2.
겨울산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싸늘해지는 마음의 창들 꼭꼭 걸어 잠그고 말없이 겨울산을 오릅니다. 쓰라린 세월 가슴에 안고 있는 침묵의 바위들이 어떻게 단련돼서 생긴 응어린지를 구태여 말하진 않겠습니다. 내 어둠 깊은 곳에 어떤 휘황한 기쁨의 말들이 그 소란함 묻고 잠들어 있는지도.. 나 모를 바람은 천길 벼랑 위에서 뛰어 내리고, 갑자기 눈앞을 막막히 가로막는 저 얼어붙은 폭포! 흐르지 않음으로 더 큰 흐름을 분명히 보여주는 저 눈부신 정신의 골격! 무릎의 관절이 미세하게 떨리고, 온몸의 땀구멍들이 땀을 토해내며 이 만남의 감격에 회답합니다.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겨울산은 빨리 저뭅니다. 저물기 전에 가야할 길이 멉니다. 오랜 나무 제풀에 쓰러져 산불 일어나는 낡은 .. 2011. 1. 21.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실패가 나를 눕게 했을 때 번민과 절망이 내 인생을 부러진 참나무처럼 쓰러지게 했을 때 날마다 걸려오던 전화 하나씩 줄어들다 다 끊기고 더 이상 내 곁에 서 있기 힘들다며 아,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부터 돌아섰을 때 마음에 칼 하나 품고 길 위에 서라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 이제는 어둡고 아무도 가는 사람 없는 길, 적막한 그 길을 혼자서 다시 가라. 돌아선 사람을 원망하는 어리석음 조용히 비워버리고 가진 것 하나 없던 처음으로 돌아가라. 마음의 분노 내려놓고 돌아보면 누구도 원망할 사람 없다. 원망은 스스로를 상처내는 자해일 뿐 가진 것 없던 만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빈 공간일수록 채울 것이 많듯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더 많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말, 주머니에 찌른 빈손 꺼내 희망을 붙잡.. 2011. 1. 17.
은비령 그날 밤, 은비령에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 5백만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 속의 작은 새 한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미스조드로 날아갈 때,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이순원의 [은비령] 중에서 ♬ Chopin , Nocturne op. 9 no. 1 in B flat minor (Danie.. 2011. 1. 10.
White Christmas! 희고 붉게 피어나 지고 피어나 지던 이 세상 아름다운 꽃잎들처럼 우리들 저무는 한해도 한송이 꽃이라면 저렇게 온 산천을 희게 물들이는 눈송이들의 입술이었을지도 몰라 - 박라연의 시에서 2010. 12. 25.
내가 바람을 사랑하는 이유 길은 호반을 따라 이어집니다 깊은 가을날이 수면 위에 아늑하게 잠겨 있습니다 산그림자들, 억새꽃들, 주황빛 꽃등처럼 서있는 감나무들, 그리고 바람들... 오랫동안 바람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들 속에 서 있으면 지상의 모든 쓸쓸한 것들의 얼굴들이 보였지요 생각하면, 바람보다 더 쓸쓸한 존재들도 없겠지요 흔적도, 꿈도,미래도, 빛깔도, 목소리도,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저 길섶에 피어난 쑥부쟁이의 꽃대궁을 한두 번 흔들어보기도 하고 노랗게 물든 느티나무의 이파리 몇개를 허공 중에 띄워 보내기도 할 뿐입니다 어떤 산골의 눈빛 참 맑은 계집아이가 산죽 이파리로 나뭇잎배를 만들어 띄울 때 나뭇잎배 뒤에 작은 파문을 새겨놓는 것도 바람이기는 합니다 두 손 모은 그 애가 물길이 막히지 않고 나뭇잎배가 제 항로를 따라.. 2010. 11. 13.
가을풍경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들 친구들의 눈매를,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 2010.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