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호반을 따라 이어집니다
깊은 가을날이 수면 위에 아늑하게 잠겨 있습니다
산그림자들, 억새꽃들, 주황빛 꽃등처럼 서있는 감나무들,
그리고 바람들...
오랫동안 바람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들 속에 서 있으면 지상의 모든 쓸쓸한 것들의 얼굴들이 보였지요
생각하면, 바람보다 더 쓸쓸한 존재들도 없겠지요
흔적도, 꿈도,미래도, 빛깔도, 목소리도,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저 길섶에 피어난 쑥부쟁이의 꽃대궁을 한두 번 흔들어보기도 하고
노랗게 물든 느티나무의 이파리 몇개를 허공 중에 띄워 보내기도 할 뿐입니다
어떤 산골의 눈빛 참 맑은 계집아이가 산죽 이파리로 나뭇잎배를 만들어
띄울 때 나뭇잎배 뒤에 작은 파문을 새겨놓는 것도 바람이기는 합니다
두 손 모은 그 애가 물길이 막히지 않고 나뭇잎배가 제 항로를 따라
여행할 수 있기를 기도할 때.. 그애의 등뒤에서 산당화 꽃향기를 풀풀
날리는 것도 다 바람의 일이지요
.....
짐작하시겠지만
내가 바람을 사랑하는 제일 큰 이유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중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 중에 그만킄 자유로운 존재가 없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많이 쓸쓸할 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가슴 속이 텅 비어
지상 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드디어 자유로와질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금고에 돈이 쌓여있고 도시에 큰 집이 있고
책갈피 속에 연인의 사랑스런 편지가 가득 꽂혀있다면
그 영혼이 어떻게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요
족쇄에 채워진 채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지상의 풀잎이나 나뭇잎 하나를 들어올릴 수 있을까요
존재의 비상.
그것은 쓸쓸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 아니겠는지요
.....
-곽재구의 [포구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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