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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내가 바람을 사랑하는 이유

by 류.. 2010. 11. 13.

 

 

 

 

 

        길은 호반을 따라 이어집니다

        깊은 가을날이 수면 위에 아늑하게 잠겨 있습니다

        산그림자들, 억새꽃들, 주황빛 꽃등처럼 서있는 감나무들,

        그리고 바람들...

         

        오랫동안 바람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들 속에 서 있으면 지상의 모든 쓸쓸한 것들의 얼굴들이 보였지요

        생각하면, 바람보다 더 쓸쓸한 존재들도 없겠지요

        흔적도, 꿈도,미래도, 빛깔도, 목소리도,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저 길섶에 피어난 쑥부쟁이의 꽃대궁을 한두 번 흔들어보기도 하고

        노랗게 물든 느티나무의 이파리 몇개를 허공 중에 띄워 보내기도 할 뿐입니다

        어떤 산골의 눈빛 참 맑은 계집아이가 산죽 이파리로 나뭇잎배를 만들어

        띄울 때 나뭇잎배 뒤에 작은 파문을 새겨놓는 것도 바람이기는 합니다

        두 손 모은 그 애가 물길이 막히지 않고 나뭇잎배가 제 항로를 따라

        여행할 수 있기를 기도할 때..   그애의 등뒤에서 산당화 꽃향기를 풀풀

        날리는 것도 다 바람의 일이지요

         

        .....

         

         

        짐작하시겠지만

        내가 바람을 사랑하는 제일 큰 이유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중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 중에 그만킄 자유로운 존재가 없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많이 쓸쓸할 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가슴 속이 텅 비어

        지상 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드디어 자유로와질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금고에 돈이 쌓여있고 도시에 큰 집이 있고

        책갈피 속에 연인의 사랑스런 편지가 가득 꽂혀있다면

        그 영혼이 어떻게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요

        족쇄에 채워진 채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지상의 풀잎이나 나뭇잎 하나를 들어올릴 수 있을까요

         

        존재의 비상.

        그것은 쓸쓸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 아니겠는지요

         

        .....

         

         

         

           -곽재구의 [포구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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