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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112

눈속에 피는 꽃 복수초 눈속에 피는 꽃은 제 몸으로 눈을 녹인다 있는 힘을 다해 꽃대를 밀어올리며 몸 밖으로 열을 내품는다 눈속에 피는 꽃은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눈속에 피는 꽃은 오직 자기 힘으로 하늘을 연다 둥글게 꽃을 열며 스스로 봄인 것이다 2010. 1. 31.
대추나무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 한알/장석주   구절초 꽃의 보랏빛 향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잠자리가 대추나무 가지로 옮겨 앉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로 나뭇가지를 잡으며 대추나무에게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는 잠자리 날개의 미세한 잎맥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네 개의 날개 끝에 있는 단아한 고동색 무늬가 곱습니다. 잠자리 몸의 아름다운 색깔들은 누가 칠해놓았는지 참 잘도 그리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작은 한 마리의 잠자리도 기나긴 장.. 2009. 9. 23.
도라지 그러므로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헤어짐에도 제목이 없다 오다가다 만난 것들끼리는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다행이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마다 꽃피고 꽃지고, 수런수런 밤.. 2009. 7. 28.
치자꽃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이해인 2009. 7. 9.
살구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 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窓엔 살구나무에 놀러 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 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 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살구나무여인숙/장석남- 2009. 6. 16.
수국 꽃색이 칠면조처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꽃이 있습니다 일명 칠변화(七變花)라고도 하는 수국(水菊)입니다 처음에는 희다가 분홍색 또는 붉은색으로 되기도 하고 하늘색,·청색으로도 됩니다 이렇게 꽃잎의 변화가 심한 이유는 토양의 산도 때문입니다. 토양이 중성이면 흰색이지만, 산성이면 청색으로, 알칼리성이면 분홍색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꽃 주위에 명반(백반)을 묻어두고 물을 주면 흰색이던 꽃색이 청색으로 변하고, 또 잿물이나 석고가루를 뿌리고 물을 주면 분홍색으로 변합니다. 꽃말도 색상에 따라 다릅니다. 백색은 절개 없는 여인과 같다하여 '변하기 쉬운 마음'이며, 하늘색은 '냉담', 분홍색은 '소녀의 꿈'이라는군요. 나무가 꽃눈을 피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 2009. 5. 17.
5월 모란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오전 낯선 골목길 담장 아래를 걷다가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는 순간, 내가 저 꽃나무였고 꽃나무가 나였던 것 같은 생각 화들짝 놀라 꽃나무 바라보는 순간 짧게 내가 기억나려던 순간 아, 햇빛은 어느새 비밀을 잠그며 꽃잎 속으로 스며들고 까마득하게 내 생은 잊어버렸네 낯선 담장집 문틈으로 기우뚱 머뭇거리는 구름 머나 먼 하늘 언젠가 한 번 와 본 것 같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고요한 골목길 문득 바라보니 문득 피었다 사라져버린 꽃잎처럼 햇빛 눈부신 봄날, 문득 지나가는 또 한 생이여 -삶을 문득이라고 부르자/권대웅 2009. 5. 15.
풀꽃의 노래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오래 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이해인 2009. 5. 13.
모과나무꽃 -저 열매를 따줘 나뭇잎은 열매에 매달려 위태롭네 당신이 발돋움해서 따온 어린 모과 열매 조심스레 혀끝에 대본다 떫고 쓴 오후 세시 이 미숙함이 우리 사랑 같아 풋과일처럼 웃고 있는 당신의 어깨 위에 모과나무 잎사귀 하나 망설이며 내려와 앉는다 오래도록 길 너머를 그리워해 본 자만이 갖는 불안한 잠, 그 끝에 갖는 오수의 달콤함 같은 것 우리 그렇게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늦은 봄 다 갈 거야 해지는 정원 키 큰 모과나무 아래 설익은 열매 하나 나뭇잎 하나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서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어느 꽃나무 아래 앉아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풀잎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꽃이 시들고 있다 이미 무슨 꽃인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서도 너는 있다 빈 하늘을 볼 때마다 너는 떠 있.. 2009.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