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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대추나무

by 류.. 2009. 9. 23.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 한알/장석주

       

       

       

        구절초 꽃의 보랏빛 향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잠자리가
        대추나무 가지로 옮겨 앉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로 나뭇가지를 잡으며 대추나무에게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는 잠자리 날개의 미세한 잎맥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네 개의 날개 끝에 있는 단아한 고동색 무늬가 곱습니다.
        잠자리 몸의 아름다운 색깔들은 누가 칠해놓았는지
        참 잘도 그리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작은 한 마리의 잠자리도 기나긴 장맛비의 회초리를 다 견뎌냈습니다.
        뜨거운 햇살의 시간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귀뚜라미 몇 마리가 언제 숨어들어 왔는지 욕실 구석에 살림을 차린 뒤
        몰래 새끼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가늘고 긴 더듬이를 뻗어 소리를 내 보낼 방향을 가늠하더니
        저녁이면 숲으로 긴 편지를 찍어 보내느라 골똘합니다.

        귀뚜라미 가족도 천둥과 번개의 시절을 다 지나왔습니다.
        그 크고 두려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새끼들을 보듬어 안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당가의 물봉선, 원추리, 배롱나무, 청죽, 질경이도 쏟아지는
        빗줄기를 다 이겨냈습니다.
        번개가 날카로운 칼날로 팽나무 가지 끝에서 뿌리까지 훑고 지나갈 때,
        흰색 보라색 도라지꽃들도 꽃부터 뿌리까지 찢어질 듯
        뜨거운 불칼을 맞으며 견뎌냈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뿌리로 땅을 움켜잡고 질렀던 소리 없는 비명을
        가을바람은 알고 있습니다.

        뿌리가 견딜 때 열매들도 똑같이 견뎠습니다.
        대추나무의 작은 대추알들도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대추나무 가지와 대추알을 연결하는 꼭지는 가늘고 짧고 작습니다.

        폭풍이 온몸을 흔들어 댈 때마다 대추알을 지키느라
        꼭지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대추보다 몸이 큰 푸른 감과 둥근 사과와 배는 제가 키워온
        제 무게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시간을 지나 지금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꽃과 나무와 곤충들이 대견합니다.

        한 알의 과일은 그냥 저절로 자란 과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견디고 이겨내 지금 완성을 향해
        과육을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송이 가을 꽃은 그냥 꽃이 아닙니다.
        청초한 빛깔은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폭풍과 장맛비와 폭염 속에서 올린 절절한 기도가
        우리가 마시는 맑은 공기 속에 신선하고 뜨거운 기운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 도종환 시인의 편지, '가을까지 온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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