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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113

구절초 들녁 경사진 언덕에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 틈에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친 들녁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 아름 고이 안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옮겨 놓고 거기서 맘대로 자라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그 생기 나날이 잃어지고 웃음 거둔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 잎 두 잎 병들어 갔다 아침마다 병이 넘는 맑은 물도 들녁에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치른 들녘 정든 흙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은 이제 시들고 마른 너를 다시 안고 푸른 하늘 시원한 언덕 아래 묻어 주러 나왔다 .. 2007. 10. 19.
쑥부쟁이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 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랏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모든 꽃송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쑥부쟁이 사랑/정일근 그대여 한 세상 사는 것도 물에 비친 뜬 구름 같도다 가슴이 있는 자 부디 그 가슴에 빗장을 채우지 말라 살아 있을 때는 모름지기 연약한 풀꽃 하나라도 못견디게 사랑하고 볼 일이다 .. 2007. 10. 2.
포도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 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레인지 속 빵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 슬픔마저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 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 이정록, '내품에 그대 눈물을' 2007. 9. 7.
상사화 아직 한 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 2007. 9. 5.
사과나무 아주 가끔은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두 팔 벌리고 서 있는 사과나무밭 태양이 눈부신 날이어도 좋고 눈 내리는 그 저녁이어도 좋으리 아주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어도 좋고 사과나무처럼 늙은 뒤라도 좋으리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류시화 2007. 9. 3.
부용 무궁화과에 속하며 꽃의 모양이나 잎의 생김새가 거의 비슷해서 사람들은 곧잘 무궁화라고 우기곤 하지요 그러나 줄기를 제외하고 잎과 꽃의 크기에 있어서 부용이 더 크고 꽃색도 화려합니다 옛사람들은 이 꽃을 특히 아름답다고 보았나 봅니다 거의 손바닥 하나를 다 가릴 만한 크기에 흰색, 붉은색, 분홍색 등으로 아주 다양한 색깔로 피는 모습은 정말 반할만 합니다 미모가 너무 아름다워 고을 원님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죽은 신라 때의 부용아씨 설화나 실화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부용상사곡"이라는 소설 속의 기생 부용을 보면 옛사람들의 그런 감정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중국 원산으로 우리나라에는 관상용으로 길가나 정원에 흔히 심는데 부산의 경우엔 올해 대부분의 공원에 심어져서 여름 내내 시원하고 화사한 아름.. 2007. 8. 26.
백일홍 여름이 한풀 꺾이며 몸살 앓는다 삼복 염천엔 문자 그대로 백일을 붉을 듯 하더니만 잡초가 억세질수록, 바로 옆 감나무 땡감이 커갈수록 한잎 두잎 바람없이 앓는다 번민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깊은 뿌리의 아픔에 잎사귀마저 윤기를 잃고 마당 한쪽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심한 영토에.. 2007. 8. 20.
도라지꽃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향기로워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내 가슴 속에 이미 피어있기 때문이다. 2007. 7. 19.
보리수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 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 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정직하겠지 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 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 물푸레 나무 아래 휘여진 히아신스 꽃길이 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 흔적 같은 향기로 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 ....... -김승희, '보리수 나무 아래로' 中에서 2007.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