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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포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어스름과 다시 돌아가기 어려운 아침 문자 메세지를 보내려다 만다 채석강 앞에서 기우뚱 미끄러진다 얼마 전부터 낯설어진 생애의 단층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목에 걸려 있던 휴대폰을 들어 파도의 이마를 향해 던진다 늦가을 격포는 제대로 어두워져 있다 땅끝 여기는 해발 제로 선(線)에서 점으로 내가 먼저 와 있다 천년 저쪽에서 달려온 별빛들이 다시 천년 저쪽으로 달려나간다 격포에서 격포로 망명한다 나의 근황은 이제 나만의 근황이다 내가 먼저 와 있는 것이다 이문재 2005. 1. 23.
눈 오는 소리 그리운 이에게는 왜 이다지도 할 말이 없는가 그 목마름 심야에 일어나 편지를 쓴다 밖엔 적막하게 눈 내리는데 쓰고 지우고 지우고 쓰고 하얀 종이 위에선 밤새 사각사각 펜촉 스치는 소리 오세영 2004. 12. 31.
겨울 일몰 누가 줄을 잡아당겼나 잠시 목례를 하고 고개를 드니 해는 어느새 떨어지고 없었다. 내 젊음이 저와 같다면 사방천지 피뿌리며 왜 곤두박질쳤을까 뜨거운 것이 무서워 몸속 불꽃을 자해로 덩어리째 흘려 흘려 어둠 속에 하얀 박꽃으로 피어 있었을 때 해는 잔인하게 더 붉은 얼굴로 떠오.. 2004. 12. 20.
날마다 이별 바람스치는 데가 어디 들꽃뿐이더냐 오늘은 풀잎과 만났네 천년 전부터 세상을 떠돌던 바람은 등굽은 소나무 송진 내음도 기억하네 누군가를 깊게 사랑한다는 것은 증오하는 만큼이나 커다란 아픔이네 먹구름이 울고 비가 내려도 푸른 하늘은 늘 거기에 있지 않더냐 조금은 기쁜 듯 조금은 슬픈 듯 그렇게 하세 천년 전부터 바람은 날마다 離別이었네 날마다 離別이었네 이길원 2004. 12. 17.
회상수첩 그해 겨울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언제나 바람이 허파 속에서 부러진 날개를 푸득거리고 있었어 생손앓이 사랑 끝에 도시는 폐쇄되고 톱질 당한 다리 절름거리며 무채색 하늘을 건너가는 가로수들 거리에는 음악소리 저물어 가고 내 목숨 마른 풀잎 하나로 허공을 떠돌았지 기다리던 함박눈은 내리지 않았어 어느새 인적이 끊어진 지하도 가판대 석간신문들은 거만한 목소리로 낭만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지 끝내 실종된 친구들은 돌아오지 않았어 시간의 늑골을 분지르며 질주하는 전동차 도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흔들리며 겨울의 중심부로 유배되고 있었지 아무도 침몰하는 세상을 욕하지 않았어 다만 흐린 밀감빛 등불 아래 어느 서정시인의 시집을 펼쳐들고 한 여자가 소리죽여 울고 있었지.. 2004. 12. 17.
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열 줄만 쓰고 그만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꽃들의 냄새가 땅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별들이 빨리 뜨지 못해서 발을 구른다. 모든 산 것들은 살아 있으므로 생이 .. 2004. 12. 17.
그리움에 대해... 기다리면 별이 된단다. 슬픔 한조각으로 배를 채우고 오늘은 쓸쓸한 편지라도 쓰자 사랑하면서 보낸 시간보다 외로웠던 시간이 많았을까 그대 뒷모습 동백꽃잎처럼 진하게 문신되어 반짝이는 내 가슴 구석 노을이 진다 슬프도록 살아서 살아서 슬픈 추억 한줌으로 남아 있는 사랑을 위해 눈감는 저녁 하늘 속에 별 하나가 흔들린다 사람의 뒷모습엔 온통 그리움뿐인데 바람이나 잡고 다시 물어 볼까, 그대 왜 사랑은 함께 한 시간보다 돌아서서 그리운 날이 많았는지… 2004. 12. 11.
해바라기 무작정 그대가 좋았다 세상에 태어나 맨 먼저 해와 친해진 어린 식물처럼 다가갈 수 없는 거리에서 바라만 보는 이유는, 세상과 해 사이에 놓인 거리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해와 해바라기처럼 바라만 보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대 아는가 해와 해바라기로 살아가는 우리의 채.. 2004. 12. 10.
12월의 엽서 12월의 엽서 이해인 또 한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 하기 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 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 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 카드 한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 2004.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