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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빈 자리... 미루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도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한마리 앉았던 빈 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 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루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 2004. 11. 26.
내게 당신은... 내게 당신은 첫눈 같은 이 처음 당신을 발견해 가던 떨림 당신을 알아 가던 환희 당신이라면 무엇이고 이해되던 무조건 당신의 빛과 그림자 모두 내 것이 되어 가슴에 연민으로 오던 아픔, 이렇게 당신께 길들여지고 그 길들여짐을 나는 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사코 거부할랍니다 당신이 내 일상이 되는 것을 늘 새로운 부끄럼으로 늘 새로운 떨림으로 처음의 감동을 새롭히고 말 겁니다 사랑이, 사랑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요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내 사랑을 이끌어 낼 사람 어디 있을라구요 기막힌 별을 따는 것이 어디 두 번이나 있을법한 일일라구요 한 번으로 지쳐 혼신이 사그라질 것이 사랑이 아니던지요 맨처음의 떨림을 항상 새로움으로 가꾸는 것이 사랑이겠지요 그것은 의지적인 정성이 필요한 것이지요 사랑은 쉽게.. 2004. 11. 23.
배가 고픈 여자 그 여자는 사춘기 여드름처럼 무럭무럭 피어나고 눈물처럼 지던 꽃을 보면서 그 말을 했다 길목마다 햇빛처럼 지나가던 연인들을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다가도 그 말을 했다 해 떨어진 공원벤치에 쓰러져 있던 홈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 말을 했다 바람 되어 사라지는 희망의 뒤통수에다 대고 그 말을 했다 공지영의 소설 봉순이 언니를 읽다가 그 말을 했다 봄 가뭄과는 달리 알아듣지 못할 말로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노래들을 듣다가도 그 말을 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그래서 사랑이 고픈 그 여자 휴대폰 액정화면 알뜰한 밀어대신 찍어준 그 말 - 나 지금 배가 고파요 Maximilian Hecker - Everything Inside Me Is Ill 2004. 11. 11.
빗길 빗길.. 그리움이 깊어지기 위하여 비는 내리는가 비가 내리면 새들도 갈 곳 모르는데 기억의 못이 툭툭 빠져 물 위를 흐르고 높아서 흐려지는 고층의 창들 사람들 사이가 젖어 흔들려도 더 멀리 가는 길은 서슴없이 밝아져 아득하고 잎 떨어진 가지 끝에 침묵이 굳기까지 완고한 그림자 위태롭게 걸려 나부끼리니 무심히 흘린 발자국에 쫓기며 비가 멎는 곳까지 걸으면 뒤늦어 소문뿐인 그대 기다림 맑은 햇살에 잠겨 먼지처럼 흩날리며 내 기약 없이 떠돈 그 많은 날들 다 용서해줄 텐가 눈부신 현기증에 고단한 내 젖은 옷 또 하나의 기다림으로 증발할 텐가 그러나 나는 아직 좁은 어둠으로 우산 받쳐든 채 빗속에 갇혀 있고 미아처럼 방황하는 세상의 다른 길들 포개지며 묽어져 정녕 길을 묻지 않는 자의 정처를 지워버리기 위하여 .. 2004. 11. 10.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함께 타고 온 기차가 떠나고 없는 것이다 갈 곳을 잃고 불현듯 허기를 느끼는 것이다 혹시나 하며 차가 떠난 자리에서 서성이는 것이다 사진전이 열리는 광화문 거리에서 장승처럼 서 있는 것이다 땡볕 속에서도 선글라스조차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지하도 건너 교보.. 2004. 11. 10.
겨울 들녘에 서서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 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 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 2004. 11. 9.
추억에 대한 경멸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 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 2004. 11. 7.
파리의 우울 파리의 거리는 온종일 비가 내리고 노트르담으로 가는 지하철 통로 저편엔 떠돌이 여가수가 자신의 꿈처럼 낡아버린 기타를 튕기며 가을비 젖은 목청으로 샹송을 부르고 있다 그녀의 모자 속에 떨어지는 은빛 동전 소리를 나는 아까부터 듣고 있었다 찰랑, 이며 일어서는 영혼의 거지들 내 노래는 언제 지상에 있었던가? 늙은 여가수 당신은 물론 알고 있을 것이다 먼 곳을 떠돌다 온 내 노래도 늘상 누군가의 원조를 필요로 했을 터 나는 노래가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으리라 생각진 않았다. 다만 보들레르가 그랬듯 육체의 완전한 廢家 속에서 혹은 有用한 삶이 던지는 냉소와 저주를 은화처럼 주워들며 세상의 도시를 부유하는 자들의 온갖 소음을 나의 음률로 만들고 싶었다 군중의 소음이 곧 음률인 노래 내 노래의 후견인인 도시 역시.. 2004. 11. 6.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하늘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2004. 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