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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323

길, 낭만에 대하여 우시장(牛市場)에서 극장까지 가는 길은 영화처럼 슬펐어요 새벽이면 안개 덜 걷힌 길을 고삐 잡힌 소들 걸어와 입 꾹 다물고 외지로 나갈 트럭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길, 영물이라 제 운명을 안다더니만 철든 녀석들이 흘린 퉁방울 같은 눈알들 툭툭 발에 채이는 신작로엔 그래서 늘 자갈투성이었죠 용각산 같은 먼지가 노을에 묻힐 무렵 극장 간판엔 십자성 반짝이고 선술집에서 소변보러 나온 술꾼들이 휘청이며 어둠 속으로 들어설 때면 애수에 젖은 문희가 오늘은 또 누구를 기다리는지, 산다는 것은 잠깐이어서 철없이 자갈길 걸으며 걷어찬 적도 많고 문희처럼 사랑하고 실연도 하지만 그래요, 유행가 가사처럼 이제와 새삼 낭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재개발로 곧 없어진다는 우시장 그 길 한 켠에 아주 가끔씩 올려지는 추억의.. 2005. 9. 7.
방파제 끝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황동규 2005. 8. 28.
어두운 것은 반짝이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까" 내 인생을 어떻게 살까 고민하면서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혼자 끌어안고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괴로워한 적이 있지요. 마음의 이상과 눈앞의 현실에서 어느 쪽을 택할까 망설이다가 결국 현실로 돌아서는 내 모습을 보면서 실망한 적이 있지요. 내가 잘못 한 것 .. 2005. 6. 16.
잠 못 이루는 사람들 새벽 두 시, 세 시, 또는 네 시가 넘도록 잠 못 이루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집을 나와 공원으로 간다면, 만일 백 명, 천 명, 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물결처럼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예를 들어 잠자다가 죽을까봐 잠들지 못하는 노인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와 따로 연애하는 남편 성적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자식과 생활비가 걱정되는 아버지 사업에 문제가 있는 남자와 사랑에 운이 없는 여자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사람...... 만일 그들 모두가 하나의 물결처럼 자신들의 집을 나온다면, 달빛이 그들의 발길을 비추고 그래서 그들이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그렇게 되면 인류는 더 살기 힘들어질까. 세상은.. 2005. 6. 8.
침묵하는 연습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 2005. 5. 29.
짧아서 더 슬펐던 아버지의 두 번 웃음 어딘가에 쓴 적이 있다. 아버지와 평생 나눈 대화를 원고지에 적는다면 다섯 장이 아닐 거라고. 아버지는 웃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근엄한 것과는 달랐다. 삶 자체가 아버지에겐 견디는 거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논과 밭의 땡볕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산과 들에 사는 나무와 바위처럼 아버지에겐 표정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도 평생에 두 번 정도는 웃었던 걸로 기억한다. 첫 기억은 구봉서 배삼룡의 ‘웃으면 복이와요’를 보던 중이었다. 참고 있던 웃음을 당신도 모르게 놓쳐버렸던 것이다. 킥, 하고 새어나온 웃음 때문에 아버지는 여간 당황하지 않았다. 식구들도 사색이 되었다. 0.5초도 지속되지 못한 아버지의 짧은 웃음 때문에 식구들은 황망히 천장을 보거나 서둘러 방바닥을 내려다보.. 2005. 5. 18.
홍길동을 기다리며 붐비는 은행 창구, 내 곁으로 홀연히 다가온 한 할머니 천천히도 말씀하신다 총각… 내… 글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돈 뽑는 것 좀 도와주시오 저쪽서, 견본 보고 고대로 하라는데 당최 어려워서 말이오 네, 그러지요 하며 받아 든 할머니의 출금표, 성명란에 '홍길동'이라 삐뚤빼뚤 그려져 있다. 혹시나 싶어 펴 본 통장에는 '홍길동'이 아닌 묵은 장 내 나는 성함, 손때 가득 묻어 찍혀 있는데, 손주 생일이라 장난감 하나 사줘야겠다고 몇 번이고 말씀하신다 어느 은행에나 나타나는 홍길동 오늘은 할머니로, 내일은 누가 되어 작은 집 담장 안으로 정 보따리 던져 주고 따뜻한 발자국 찍으면서 이 동네 저 동네 출몰할런지. 번호 호출되자 학생마냥 손 드시곤 은행 아가씨와도 손주 생일 축하하고 흐뭇하게 은행을 나가시는 할.. 2005. 5. 6.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 말은 거품이 된다. 말은 이슬이 된다. 말은 한줄기 빗물 한 가닥 바람으로 풀려 버린다. 나의 말은 언제나 그렇다 나의 말이, 말이 되어서 뜻으로 그에게 전해지는 법은 없다. 나의 생각은 그래서 말이 되지 못한 채 생각으로 어떤 형체나 의미를 가지고 살아나지를 못한다 나의 생각은 말이 된 적이 없다. 내 생각이 말이 되어 그에게 전해진 적이 없다. 아, 이것이 비극이다. 나의 말은 뜬구름처럼 흩어지고 물처럼 증발해 버리고 가을 낙엽처럼 말이 되기 전 마음속에 가득 살라 내리고 마는 것이다. 내 생각 속에는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이 큰 잔치를 이루며 붐비고 있는데 항상 그에게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말들로 웅성거리고 있는데 나는 아직 그에게 단 한마디도 전하고 싶은 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늘 그에게 하고.. 2005. 5. 5.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머리 속에서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때론 연하게, 때론 짙게 아롱거리는 안개 밋밋한 자리 감돌며 밤낮을 나보다 한발 앞자리 허허 떠 있는 그 "있음"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충만히 머리 속에서 넌 그 거리에서 좋은 거다 항상. . . . . -조병화- 2005.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