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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323

안부.... 저녁노을이 말없이 풀리는 수국색 창가에 서서 그대가 서있는 곳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그대 생각하다가 날이 저물고 그러다가 무심한 날의 안부처럼 하루 해가 또 저물었습니다 어느 새 밤은 닿고 나는 그대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 저문 목숨을 서둘러 보지만 서툰 발자국들이 곤곤히 빠져나간 거리에는 그대 처음 만나던 날의 귓볼 파아란 산녘바람처럼 아직은 속살이 성긴 봄바람 한 자락이 발심한 듯 온 세상을 야트막하게 털고 있습니다 그대의 하늘도 저렇듯 적막한지요 2006. 3. 27.
여백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빼곡한 숲처럼 정글처럼 살지 말자. 털어내고 덜어내어 공백을 가슴속에 만들자. 항아리의 오목한 허공도 좋다. 백지여도 좋다. 나의 빈 곳으로 언제든 당신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도종환 2006. 3. 22.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 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녹아 사랑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리라 사랑하면 봄보다 먼저 온몸에 꽃을 피워내면서 서로 끌어안지 않고는 못 배기는 꽃술로 얽히리니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무겁게 말문을 닫고 영혼 깊어지는 그 사람과 나란히 서서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 파도치는 봄의 들판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라 신달자 2006. 3. 21.
스친다는 것 새로 사 온 시집을 넘기다가 종잇날에 손가락을 베었다 살짝 스친 것도 상처가 되어 물기가 스밀 때마다 쓰리고 아프다 가끔은 저 종잇날 같이 얇은 生에도 마음 베이는 날 그 하루, 온통 붉은 빗물이 흐른다 종잇날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모두 상처다 나와의 만남도 상처며 나와의 헤어짐도 상처다 무딘 날에 손 베인 적 있던가 무덤덤함에 마음 다친 적 있던가 얇은 것은 상처를 품는다 스친다는 것은 상처를 심는 거다 스친다는 것/박선희 2006. 3. 17.
둘이 사는 고독 둘이 사는 고독 -박 원철- 사랑이 찾아오려면 혼자라는 고독으로 그것이 들어 올 자리를 비우게 된다. 이윽고 사랑이 찾아오면 둘이라는 사실에 감격하지만 그것은 곧 처음보다 더 고독한 혼자로 대치되고 만다. Eva Cassidy / Ain't No Sunshine 2006. 3. 16.
세상은 보는대로 존재한다 신발 사러 가는 날 길에 보이는 건 모두 신발 뿐이다. 길가는 모든 사람들의 신발만 눈에 들어온다. 사람 전체는 안중에도 없다. 미장원을 다녀오면 모든 사람의 머리에만 시선이 집중된다. 그외엔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런가하면 그 반대 경우도 있다. 근처 도장방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나는 갑자기 멍해진다. 어디서 본 듯도 한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바로 회사앞에 있는 그 도장방을 아침저녁 지나다니면서도 도대체 기억속에는 남아있질 않는 것이다. 마치 그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거나 다름없다. 사실이 그렇다. 세상은 내마음 끌리는대로 있기 때문이다. 조화도 그게 가짜인 줄 알때까진 진짜꽃이다. 빌려온 가짜 진주 목걸이를 잃어버리고는 그걸 진짜로 갚으려고 평생을 고생한 모파상의 어느 여인의 이야기도 이.. 2006. 3. 14.
지혜로운 자의 길 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길이.. 2006. 3. 8.
계단 계단을 오르며 나는 아직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이 정직한 ,한결같은 보폭은 언젠가 내 몸을 지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계단처럼 단순하고 확실한 것이 어디 있으랴. 계단오르는 이들은 고개 들지 않는다. 그것이 결코 발에 대한 불신 때문만은 아니다. 목표는 언제나 우리를 조급하게 만.. 2006. 3. 1.
나도 모른 너의 슬픔 그리운 모습은 날려 버리고 미련의 뿌리도 죄다 흔들어 버리고 하늘엔 울지 않으려고 흰 왜가리가 날았다. 겨울 한파는 모두 너의 방으로 불어 닥쳤지만 너는 얼어 죽지 않았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동안 너는 늙지 않았고 마약은 하지 않아도 단지 말만 해도 마취되어 온 슬픔을 잊었다. 영화 "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며 한물간 청춘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가 즐기고 즐겼다. 전등도 음악도 끄고 모든 기대도 껐지만 목숨은 끊지 않았다 너는 죽어서 왜가리 친구가 되기보다 독하게 살아서, 너 없으면 못 살 중증 애정 결핍증 환자의 연인이 되기로 했다. 신 현림 2006.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