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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못된 것들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 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 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 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이재무 2005. 6. 22.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이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 길 지도 위에 새겨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 산이 사람에게 풀어 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 갈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 길 따라 내가 가네 정일근 2005. 6. 16.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멀어져서 아득하고 아름다워진 너는 흰 셔츠처럼 펄럭이지 바람에 펄럭이는 것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내 눈 속의 새들이 아우성친다 너도 나를 그리워할까 분홍빛 부드러운 네 손이 다가와 돌려가는 추억의 영사기 이토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구나 사라진 시간 사라진 사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해를 보면 해를 닮고 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신현림 2005. 6. 14.
옛집 내 기억의 풍경은 옛집이었다 그 옛집의 마당 펼치는 순간 허공에 던져놓은 둥근 멍석처럼 새떼들이 까맣게 날아올랐다 그 옛집 마당 잃어버렸던 새들 거미줄에 친친 걸린 것처럼 내 기억 속에서 얼마나 파닥였을까 어느 가을날 내 기억 속의 새들이 날아간 뒤 새들을 널기멍석처럼 놓아먹인 너른 마당이 있던 그 옛집에 가보았더니 옛집 보이지 않고 분명 이곳이라고 네댓 그루의 대추나무 감나무가 말하는 것인데도 어디서 많이 본 것도 같은 아주 낯익은 새들 앉혀놓고 말하는 것인데도 마당도 옛집도 보이지 않고 오래 전 내가 옛집 뜰 때 나와 같이 새들도 뜨면서 내 기억 속으로 떠메고 갔던 그 옛집 풀 동산 무성한 이곳에 와서는 기억해내네 금방이라도 마당으로 내려앉을 것처럼 저 감나무 대추나무에 새들이 앉아 있는 이곳에 와서.. 2005. 6. 14.
여름엽서 오늘같은 날은 문득 사는 일이 별스럽지 않구나 우리는 까닭도 없이 싸우고만 살아왔네 그 동안 하늘 가득 별들이 깔리고 물 소리 저만 혼자 자욱한 밤 깊이 생각지 않아도 나는 외롭거나 그믐밤에는 더욱 외롭거니 우리가 비록 물 마른 개울가에 달맞이꽃으로 혼자 피어도 사실은 혼자이지 않았음을 오늘 같은 날은 알겠구나 낮잠에서 깨어나 그대 엽서 한 장을 나는 읽노라 사랑이란 저울로도 자로도 잴 수 없는 손바닥 만한 엽서 한 장 그속에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 말 한 마디 만으로도 내 뼛속 가득 떠오르는 해 이외수 2005. 6. 11.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한때 나는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았다 새가 날개를 가지듯 꽃이 향기를 품고 살아가듯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별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생의 비밀을 적었다 아이의 미소를, 여인의 채취를, 여행의 깨우침을 우체통은 간이역이었다 삶의 열차가 열정으로 출발하다 나의 편지를 싣고 가는 작은 역이었다 그래 그런 날들이 분명 있었다 낙엽에 놀라 하늘을 올려다 본 어느 날이었다 찬바람이 몰려왔다 갑자기 거친 바람에 창문이 열리듯, 낙엽은 하늘을 듬성듬성 비어 놓았다 그것은 상처였다,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종착역이 되었다, 모두들 바삐 서둘러 떠나고 있다 나의 우체통에는 낙엽만 쌓여 가고 하늘은 상처투성이의 어둠이었다 밤엔 별들이 애써 하늘의 아픔을 가리고.. 2005. 6. 8.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다 날리는 꽃잎들은 어디로 갈까, 꽃의 무덤은 아마도 하늘에 있을 것이다. 해질 무렵 꽃잎처럼 붉게 물드는 노을. 떨어지는 별빛들은 어디로 갈까, 별의 무덤은 아마도 바다에 있을 것이다. 해질 무렵 별빛 반짝이는 파도, 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뒤바뀌는 것 지상의 꽃잎은 하늘로 하늘의 별.. 2005. 6. 3.
유월이 오면 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 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많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산천을 따라 밀이삭 마늘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것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2005. 5. 29.
그 여자의 울음은 내 귀를 지나서도 변함없이 내 울음의 왕국에 있다 나는 그 여자가 혼자 있을 때도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여자의 울음을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여자의 울음을 끝까지 자기의 것이고 자기의 왕국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러나 그 여자의 울음을 듣는 내 귀를 사랑한다 정현종 2005.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