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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 2005. 8. 25.
가을노트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문정희 2005. 8. 24.
바다에 갈 때가 되어 흔들리는 바다에 섰다. 물결 깊숙이 숨어 있던 침묵들이 일어나 나의 귓가에 매달리며 겨우 달래 놓은 바다를 깨우고 있다. 멀리 돌아앉은 섬. 등대 푸른 의식이 절망으로 무너질 때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뒤로 노을을 지운다. 외면해도 따라오는 나의 그림자. 언제나 내가 먼저라고 말하지 못하고 파도들이 순서대로 달리는 걸 따라 달리고 있다. 침묵 속에 흔들리는 바다만이 나와서 자신을 말할 수 있고 물결은 그래도 흘러갈 뿐 어디서 멈출지 알지 못한다. 흔들리는 바다에 섰다 서정윤 ♬ Ernesto Cortazar - Blue Waters 2005. 8. 23.
살다보면 하나 둘쯤 살다 보면 한 둘쯤 작은 상처 어이 없으랴 속으로 곪아 뜨겁게 앓아누웠던 아픈 사랑의 기억 하나쯤 누군들 없으랴 인생이란 그런 것 그렇게 통속한 일상 속에서 가끔씩 아련한 상처 꺼내어 들고 먼지를 털어 훈장처럼 가슴에 다는 것 그 빛나는 훈장을 달고 그리하여 마침내 저마다의 그리운 하늘에 별이 될 때까지 잠시 지상에 머무는 것 김시천 2005. 8. 4.
저녁 들길에서 그 어느 곳에 먼 노을을 즐기지 않을 이 있으리 그 어느 곳에 늦은 깨달음을 용서하지 않을 이 있으리 수많은 방황 끝에 경건한 제사에 도착한 내 젊음의 약한 시선도 탓하지 않으리 조용히 불 꺼져가는 저녁 무렵 누구도 이 말없는 애태움을 그리워하지 않을 이 있으리 그리고 마침내 남은 육신이 밤에 멀리 혼자일 때 나는 나를 지켜준 모닥불의 온기를 이 들길에 고이 묻고 떠나리 마종기 2005. 8. 4.
군불 때는 저녁 장마철이 되면 어김없이 바닥에서 물이 치솟는 부엌에 앉아 저녁 내내 군불을 때거나 하릴없이 청솔가지를 툭툭 꺾어 손톱 밑 때를 파거나 이런 날 아귀가 맞지 않는 문틈 사이로 온몸을 밀어내며 햇살과 그 햇살을 향해 달려드는 먼지를 구경하다 나도 문득 옹이가 많은 불쏘시개처럼 오래오래 타고 싶었다 김창균 2005. 7. 12.
은사시나무 은사시나무, 나의 사유思惟 이른 봄 마당에 은사시나무를 심었다 뿌리가 깊어지면서 이파리들은 은빛 바람을 몰고 왔다 바람불면 나는 은어 떼처럼 몸을 흔들면서 하늘로 비상했다 동터 올 때면 내 몸에 붉은 물이 들었다 한나절 나무그늘에 누워 있으면 무수한 사유思惟의 새들이 떼지어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가을 찬비 내리던 날 나는 신열에 몸을 떨고 서 있었다 화려한 사상思想의 잎들이 내 몸뚱이에서 비늘처럼 떨어져나갔다 그해 겨울 나는 마당 귀퉁이 은사시나무 곁에서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곤 했다 밤이면 나무가 추위에 떠는 소리가 들렸다 시린 강물소리도 먼 바람결에 실려왔다 이 계절 나무는 어떻게 나이테를 만들고 있을까 새벽이면 나는 발 시린 나무 곁에 서서 하늘로 치솟기만 했던 사유의 가지들이 성장을 멈추.. 2005. 7. 2.
서해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이성복 2005. 6. 26.
그리운 밤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당신은 말없이 제게 찾아 오십니다 차라리 당신에게서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그렇게 말 없이 제게 오십니다 남들은 그리움을 형체도 없는 것이라 하지만 제게는 그리움도 살아 있는 것이어서 목마름에 애타게 물 한 잔을 찾듯 목마르게 당신이 그리운 밤이 있습니다 절반은 꿈에서 당신을 만나고 절반은 깨어서 당신을 그리며 나무잎이 썩어서 거름이 되는 긴 겨울 동안 밤마다 내 마음도 썩어서 그리움을 키웁니다 당신을 향한 마음은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뛰는데 당신은 언제쯤 온 몸 가득 물이 되어 오시렵니까 서로 다 가져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 언제쯤 물에 녹듯 녹아서 하나 되어 만나렵니까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쓸쓸히 자리를 펴고 누우면 살에 닿는 손길처럼 당신은 제게.. 2005.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