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세상 인연을 새삼 돌아보는 곳
보성 대원사
다른 경계로 들어선 듯 하다.
좀전만 하더라도 세상에 발 담그고 있었는데 이 공간의 독특한 아우라는 방금 건너온 저 곳을 아주 먼 곳으로 느끼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에 자리한 백제고찰 대원사.
절에 들어선 이들을 제일 먼저 맞는 것은 군데군데 서있는 돌무지이다. 돌무지 봉우리에는 동자지장이 앉아있다. 대원사가 태아 영가(영혼)들의 천도를 위한 절이라는 것을 입구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현판이 걸린 문을 건넌다. 문 양쪽 주련에는 '이 세상은 한송이 꽃' '모든 생명 나의 가족' 이라 씌어 있다.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큰 꽃을 이루고 있는 꽃잎 한송이 한송이이므로 외로움과 고통속의 이웃들을 한꽃으로 보살피고 가꾸어가자는 뜻이 담겨 있다. '너'와 '나'가 따로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 한송이 꽃임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모든 생명을 한 가족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을 자비라 한다.
일주문을 넘으면 조그만 돌다리를 만난다. "중생을 건네오리다". 유순하게 엎드린 등같은 돌다리를 건넌다.
부모공덕불을 만난다. 부모불이라니, 생소하다.
"집안에 부처님이 계시니 바로 부모님입니다"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에 이 부모공덕불을 만든 의미가 깃들어있다. 부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는 부모님이라는 것. 나무한테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렇듯 사람의 뿌리를 부모님과 조상으로 보는 것이다.
부모공덕불은 그런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뉘우치고 은혜에 눈뜨게 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부처님인 것이다. 화순 운주사에 있는 석조불감의 형태로 만들어진 이 부모공덕불의 앞면은 눈물 흘리는 아버지불이고 뒷면은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은 어머니불이다. 들여다보면 두 분 모두 눈 아래 눈물길이 나
있다. 이세상 모든 자식은 부모님의 눈물로 크는 것이니...
부모공덕불을 지나면 연지문(蓮池門) 아래 닿는다. 연못가 나뭇가지에는 걸리버국의 염주처럼 보통의 염주보다 몇배는 큰 염주들이 걸려있고 또 그렇게 큰 목탁이 걸려 있다.보통의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대원사는 염불선 수련도량이다. 염불선이란 무엇인가. 통일신라시대 원효가 널리 퍼뜨린 염불선은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과 달리(즉 교종이 당시 지배층의 불교였다면) 어려운 교리나 경전을 모르더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외면 성불할 수 있다는 희망을 대중들에게 안겨준 수행방법이었다.
대원사 나뭇가지에 걸린 염주와 목탁은 일상속에 염불을 생활화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극락전이 둥그렇게 안겨보이는 연지문을 지나면 연꽃모양으로 된 징검돌 9개를 건너게 된다. 하품하생(下品下生)으로부터 상품상생(上品上生)에 이르는 돌다리이다. 품성을 갈고 닦으며 정진의 단계를 건너고 건너 비로소 상품상생, 극락정토에 연꽃으로 피어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제 부처님발(佛足)에 예배할 차례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불전을 향해 반배한다. 오른손으로 물을 묻혀 정수리에 세 번 바른다. 두 손을 부처님 엄지발가락에 올리고 이마를 석련(石蓮)에 조아린다. 부처님과 이웃들에게 잘못한 일을 참회하고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나무아미타불'을 세번 하고 기도를 마친다. 부처님발에 예배하는 공덕의 하나는 임종시 마음이 편안하고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다는 것.
불상이 없던 무불상시대에는 부처의 족적이 가장 큰 예배대상이었다 한다. 대원사의 부처님발 예배에서는 그런 원시신앙의 한 형태를 접하게 된다.
돌방석에 넉넉하게 앉아있는 포대화상도 만날 수 있다. 포대화상은 중국 명나라때 스님이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포대에서 꺼내주었다 해서 후세 사람들이 미륵불의 화현으로 받들었다.
"나에게 한자루의 포대가 있는데 닫으면 바늘 하나 들일 곳 없지만 열어놓으면 온 세계가 함께 하네"
포대화상의 전언에는 시대를 초월해 어느곳에서나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닫으면 바늘 하나 들일 곳 없지만 열어놓으면 온 세계를 들일 수 있는 것. 그것은 마음이다. 함께 나누는 마음, 베푸는 마음이다.
포대화상 참배방법도 친근하고 재미있다.
포대화상의 배꼽을 만지면서 아랫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돌리며 만진다. 그렇게 손길이 많이 닿아서인지 배꼽부분이 거무스레하다. 포대화상이 크게 웃을 때 그 웃음을 따라 함께 웃으면 세가지 복이 생긴다 한다. 무병, 장수, 부귀이다. 그래서 포대화상은 우리말로 옮기면 '복(福)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영어로는 '해피 부다(Happy Buddha)'이다.
또다른 참배법으로는 포대화상의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책갈피나 책상앞에 놓고 웃는 연습을 하는 것도 있다.
부처님발에도 예배하고 포대화상에도 참배하고 나면 극락전에 닿게 된다.
백제 무령왕 3년(503년)에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대원사는 고려시대 조계산 송광사 16국사중 제5대인 자진원오국사에 의해 극락전 선원 승방 등이 중창돼 선정쌍수 대가람으로 거듭났다 한다. 여순사건때 극락전만 남기고 모두 불타버렸으며 90년부터 선원과 요사, 산신각과 범종각, 일주문과 아도영각, 석불전 등이 복원됐다.
옛모습을 간직한 극락전안에는 조선 숙종 연대의 달마도가 남아있다.
극락전 왼쪽 옆에는 이 절을 중창한 자진원오국사 부도가 있다. 8각원당형 탑신에는 '자진원오국사지탑'이란 명문이 있으며 각 면에 보살과 사천왕 등이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극락전 오른쪽 옆으로는 태안지장보살이 서있다.
천봉산 자락의 대원사는 지세로 보아 여성의 자궁에 해당된다 하는데 바로 그 중심에 지장보살상이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저승의 어머니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보살이 머리에 보관이나 화관을 쓰고 있는 것과 달리 지장보살은 그저 스님같은 민머리이다. 태안지장보살은 그중에서도 태아의 영혼을 고통과 원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의 어머니이다. 태아령이란 부모와의 인연은 맺어졌지만 이 세상의 햇볕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어린 영혼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사이의 강가 모래밭에는 부모 자식간의 인연이 두텁지 못해 어려서 죽은 갓난 아기들이 모래밭에서 탑을 쌓는다. 부처님의 공덕을 빌려 삼도의 강을 건너려고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탑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탑이 완성될 무렵이면 저승 도깨비들이 탑을 부숴버려 어린 영혼들은 울다가 지쳐 잠이 든다. 그때 지장보살이 나타나 어린 영혼들을 감싸안는다.
오른손에는 아미타불을 모신 석장을 짚고 왼손으로는 동자를 안고 있는 태안지장보살의 모습은 이런 불교설화에서 유래한다.
대원사 주지 현장스님은 낙태아 등 어린 영혼들을 천도하고 부모의 죄업을 씻고자 지난 93년부터 태안지장보살상을 봉안하고 태아령 천도 백일기도를 1년에 2차례씩 봉행하고 있다.
극락전 뒤편 대숲사이로는 오솔길이 나있다. 청정함 가득한 그 길을 걷는 동안 마음에도 푸르고 서늘한 기운이 배인다. 그 대숲이 끝나는 길엔 또다른 세상인 듯 돌무지가 펼쳐진다. 어린 영들을 위해 묵언하고 명상하는 공간이다. 단풍잎이 다 져서 길을 붉게 덮고 있는 그곳에 서면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으매 나는 가노란 말도 못하고..." 제망매가 한구절이 떠오른다.
"죽음 뒤에 맞을 세계를 알게 되면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성숙하게 된다"는 현장스님의 가르침도 떠올리게 된다.
길은 예서 끝나지 않고 성모각으로 가는 오솔길이 이어진다. 6·25 당시 불타 없어진 산신각을 지난 95년 복원해 '성모각'이라 이름했다. 산신각에는 보통 호랑이를 거느린 할아버지상을 모시지만 이 곳에선 성모산신이 사슴을 거느리고 있다. 일주문에 들어서는 중생을 어머니품처럼 감싸주는 혈자리에 성모각이 있는 것은 아버지에게 말하기 어려운 부탁을 어머니에게 하듯이 어머니 산신에게 마음의 근심걱정을 기대라는 의미다.
우리네 삶의 인연과 생명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대원사. 죽음을 통해 들여다보는 지금 이곳의 삶과 인연.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겸허해진다.
*교통
-승용차 이용시 화순읍에서 사평, 주암호 가는 길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대원사 표지. 이 길 입구에서 대원사까지는 6km(봄이면 이 긴 길이 온통 벚꽃으로 뒤덮인다)
버스 이용시 광주고속터미널에서 117번 시내버스 타고 사평종점 하차. 대원사까지는 택시나 군내버스 이용.
*먹거리:대원사 들어가는 길에 '청광도예원'을 비롯 '천봉산가든'과 '두메산골' 등이 있음. 서재필 기념관에서 순천 송광면쪽으로 가다보면 숙박과 식당 등을 겸한 '언덕의 집'(061-853-0082)이 있음.
*주변관광:백민미술관, 서재필생가와 기념공원, 고인돌공원, 주암호
*여행쪽지
-대원사는 현재 절입구에 '티벳불교미술관' 건립공사를 추진중. 1,000평 대지위에 티벳불교 사찰양식으로 세워지며 티벳불교 미술품 중 예술성 높은 만다라와 불상, 경전과 밀교법구 등 500 여점이 상설전시된다. 내년 3월 개관 예정.
-주지 현장스님의 지도로 매주 1박2일 단기출가교육(주말수련회)이 열린다. 토요일 오후5시∼일요일 오후2시 열리며 정토수행법, 염불명상법, 선체조, 관정기도 등을 수련. 문의는 061-852-1755.
-절을 둘러보고 나서는 길에 절 입구 '다락방'(茶樂房)에서 차 한잔. '차한잔 하고 정신차리기'란 의미로 만든 공간으로 녹차를 무인판매한다.
-대원사 아래쪽에 '백민 미술관'이 있다. 지난 92년 개관한 이 미술관은 보성출신 서양화가 백민 조규일씨가 자신의 작품과 국내외 화가들의 작품을 기증해 세워진 것으로 오지호 허백련 손재형 조방원 오승윤 강연균 등 이지역 근현대작가들의 작품과 제정러시아 시대 이콘, 러시아작가들의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하며 개관은 3∼10월은 오전9시∼오후6시, 11∼2월은 오전9시∼오후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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