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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想

빗소리

by 류.. 2007. 8. 21.

전에 양철 지붕 아래서 빗소리를 들으며 하룻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허허벌판 저수지 가의 농막이었는데, 밤 낚시를 나가서 돌연히 만난 폭우였다
초저녁에 시작한 비가 한 줄기 긋고 지나가겠지 하고 곁에 있는 농막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나 비는 새벽까지 내리붓고 있었다

빗줄기는 세차서 지붕을 때리는 소리 외엔 그 어떤 소리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귓속이 멍~ 해지도록 두들겨대는 난타
마치 휘모리 장단으로 쳐대는 장구 소리를 장구통 속에서 듣고 있다면 이러할까

공포와 외로움, 내나 스스로 결박해 버린 자유, 내 귀에서는 웅웅 거림만이 반복되고...


그때 내 머리를 스쳐간 것은 ‘그래, 이 소리를 하나의 이명(耳鳴)으로 치자
그리고 그 이명을 평상의 소리로 여기기로 하자’였다 그러자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외로움과 조급함이 사라져갔다

귀에서는 다시 새로운 빗소리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기억의 저편에서 맨 먼저 들려오는 것은 낙숫물 소리였다
여름 낮에 소나기 한 줄기가 내리고 간 뒤 처마 끝에서 여운처럼 떨어지던 물소리..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낙숫물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가랑비는 밖을 내다보지 않으면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른다
세찬 비가 내릴 때는 웅웅거리는 소음을 만들어 낼 뿐, 창 밖을 내려다보아도
시멘트 바닥과 거기 딱정벌레들처럼 엎드린 차들에 빗줄기는 내리건만
튀어 오르는 빗방울의 비명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서로 앞서가려고 지르는 비명, 내 것만 챙기자고
내 말만 들으라고 아귀다툼하는 비명들이 이 아파트 숲에서는 비와 함께 유령처럼 웅성거린다

그러나 나 또한 눈앞의 평안과 편리만을 좇아 이 축에 끼어 살아간다
그러면서 조금씩 예사로워져 가고 있다. 아니 마비되어 가고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 걸까

바람 부는 언덕에 서면, 밀밭을 출렁거리게 하던 바람의 서늘함
연잎 후드기는 혹은 가랑잎에 사그라 대는 빗소리에도
한없이 펼쳐지던 상상의 날개는 어디로 갔을까

산에 살면 산을 닮고 강에 살면 강을 닮는다는데
콘크리트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무엇을 닮아가고 있을까
나의 눈과 귀, 가슴과 머리는 얼마만큼 콘크리트로 굳어가고 있는 것일까



아, 온갖 나무들이 어울려 이루어낸 숲

숲에 내리는 빗소리를 영원히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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