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 젖은 단풍나무

by 류.. 2017. 4. 26.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그 젖은 단풍나무, 여름 숲에서 저 혼자 피처럼 붉은 잎

    사귀,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 먹은 포플린을 쫘악 찢는 외마디 새 울음, 젖은 숲 젖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라 생각했다 그대 바로 지금, 느닷없이 고통의 전면에

    나서고 이윽고 여울 빠른 물살에 실린 붉은 잎사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라도 상처 하나쯤은

    꼭 지니고 가기 마련이다.


    멀리서 보면 초록숲이지만 그 속엔 단풍나무가 있고 때론 비 젖은 잎, 여윈 손처럼 내밀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말없음표 같은 비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미는

    낯선 손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아직 몰랐다 다만 여름숲은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그 단풍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고통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 했다 그렇다.


    이렇게 살다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세운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듯이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


     지금이 꼭 가을이 아니라도.




    이면우



    ♬ Eleni Karaindrou - Adagio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들면 다 꿈이고  (0) 2017.05.22
오월 편지  (0) 2017.05.15
그리운 이름  (0) 2017.04.18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0) 2017.04.10
한 농부의 추억  (0) 2017.04.0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