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그 젖은 단풍나무, 여름 숲에서 저 혼자 피처럼 붉은 잎
사귀,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 먹은 포플린을 쫘악 찢는 외마디 새 울음, 젖은 숲 젖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라 생각했다 그대 바로 지금, 느닷없이 고통의 전면에
나서고 이윽고 여울 빠른 물살에 실린 붉은 잎사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라도 상처 하나쯤은
꼭 지니고 가기 마련이다.
멀리서 보면 초록숲이지만 그 속엔 단풍나무가 있고 때론 비 젖은 잎, 여윈 손처럼 내밀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말없음표 같은 비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미는
낯선 손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아직 몰랐다 다만 여름숲은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그 단풍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고통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 했다 그렇다.
이렇게 살다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세운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듯이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
지금이 꼭 가을이 아니라도.
이면우
♬ Eleni Karaindrou - Ada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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