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키 큰 느티나무가 왜 이렇게 작아졌을까
발돋움하여도 발돋움하여도 손 닿지 않던 수양버드나무 가지에 하루 해가 걸려
놀로 지는 지붕이 아름답던 그때
숨차게 달려도 먼산처럼 닿을 수 없었던 운동장
그 끝에 서 있던 백양나무는 둥치만 남고
우리가 깔매놀이를 하던 플라타너스 밑에 우뚝 서 있던
그 바위는 삭아 흙이 된 지금
우리가 차던 재기, 우리가 받고 놀던 공깃돌도 먼지가 된 지금,
황혼녘의 지붕은 담요처럼 포근하고
잔광에 반짝이는 기왓장들만 숨쉬는 목숨이 되어
이 적막과 저 적막을 불러와 산 뒤에 앉힌다
누구의 소년이든 한번은 이 황혼에 발 묻었을 것이다
누구든 한번은 이 황혼이 제 추억의 이불이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수천의 잎새 뒤로 저녁별이 돋을 때
제 가슴의 슬픔을 세수시키고 누구든 그 반짝이는 기쁨 속으로
달려간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때 누구든 소낙비 같은 풍금 소릴 들었을 것이고
창문에 부딪치는 바람소릴 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친구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봄이면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움이 땅위로 솟던
그날의 글라디올러스와 그날의 난초잎과
그날의 조회단을 기억할 것이고
그날의 돌계단과 그날의 칠판을 기억할 것이다.
아니, 더러는 일곱 살 난 제 아이에게 가방을 메어 주며
운동장에 버린 그날의 검정 운동화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삶은 슬픈 것만도 아니고 외로운 것만도 아니라고
소줏잔을 어루만지며
노랫말도 곡조도 반쯤은 잊어 버린 유행가를 부를 것이고
햇살처럼 쨍쨍한 추억이 있고 그 추억에 불을 켠 마음의 심지가 있다면
삶은 남루도 아니고 넝마도 아니라고
헌 책갈피에 시인의 흉내를 내며 한 줄 글말을 써 넣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찬란한 오늘도 어제 속에 묻힌다
어제라는 추억의 고삐를 당기면
누구의 추억이든 기운 자리가 오히려 아름다운
다림질한 모본단 저고리가 된다
슬프기 위해 쓰는 시는 없어도
슬프기 위해 부르는 노래는 있듯이
아름답기 위해 깨어지는 유리창은 없어도
아름답기 위해 찢어지는 색종이는 있다
그 느티나무 그늘에서 익힌 말과 글로 선생을 하고
그 버드나무 그늘에서 익힌 생각의 수틀로 시를 쓰는 지금
한번도 남을 미워해 본 적 없는 산 아래 누워
들판이 꾸던 꿈을 대신 구며
햇살이 닿을 때 떨리는 잎의 마음으로
오늘은 잘 떠오르지 않는 들꽃의 이름을 불러보고
옛날 만지던 따뜻한 돌멩이를 만진다
황혼이 아름다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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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
♬ 동물원 - 혜화동(박보람,"응답하라 1988"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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