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십 년이나 못 만난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래 그것은
나이도 나이지만 새것이 되어 서 있는 가을 나무 아래 오래 앉아 있게 만든다
간혹 물든 잎들이 떨어지는 각도를 손바닥을 펴서 받아든다
만난지 십 년이 넘은 친구를 만나서 나는 이 낙엽의 각도를
십 년간 키워온 나의 사상이라고 말해주련다
나의 사상. 나뭇잎이 떨어지는 각도를 알아차렸다는 것은 위대하다
지난 봄에도 몇 개의 묘목들을 사다가 수돗물을 뿌리면서 계단 아래 흙에 묻었었다
나의 사상.
계단을 오르내리며
오르고 내리는 것의 섭리를 생각한다
국제 정세와 남북경협을 생각하기도 한다 위대한 진리인 미국을 생각하고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끽 소리 나지 않게 우아하게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목숨은 그래도
끝까지 부지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찍 소리 나지 않게
나를 단속하고 간혹은 딴청을 부려야 한다는 기교까지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또 한 친구는 영업을 하려 든다
물이 중요하다고. 요는 정수기를 들이라는 친구가 있고
낡은 차를 바꾸라는 친구가 있다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느냐고 정치인 취급을 하는 친구가 있다
어떤 친구는 과거를 험담한다
나의 정직은 과거에도 있지 않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다
나의 정직은 모든 시간속에 長江萬里와도 같이 유유하다
유유한 시간 속의 정직을 나뭇잎이 떨어지는 각도는
아름답게 수식한다 나는 저 수식이 좋구나
나는 이 가을 나무 아래 더 앉아 있다가
더 오래 앉아 있다가 불이 켜지는 서울을 내려다보며
더. 더 앉아 있다가
이 나뭇잎이 수북이 한 인간을 다 덮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뭇잎이 어깨를 친다는 사실에도 놀란다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점점 새롭게. 새롭게 서고 있다
저 정직이 오랜 우정이라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겠다
귀는 얼고
장 석남
..................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면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장석남,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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