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밤에는
이 세상 가장 슬픈 시를 읽고 싶다
슬픔이 아름다워 차마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시집을
헌책방에 가서 오백 원 주고 사 온
옛날 시집을 다시 꺼내 읽고 싶다
종이 썩는 냄새가
조금은 코에 거슬리지만
그것이 추억의 냄새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즐겁고 떨어져 나간 책 귀퉁이의
구절이 새록새록 상상 움을 내미는
책상을 정리하다
나온 흑백 사진 같은 시집을
눈 오는 밤엔 내가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이 되어 읽고 싶다
전화도 티브이도 없는 곳이면 더 좋겠다
캄캄함이 하얗게 빛나는 외진 곳으로
먼 나라 사람 지바고처럼 털모자를
눌러 쓰고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펑펑 눈 오는 밤에는
잊혔던 호롱불 심지를 올리고
불빛이 흐려 글자가 잘 안 보이는
작은 방에서
지금은 죽은 작가가 쓴
이별이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싶다
실패가 아름다운 연애,
슬퍼서 아름다운 소설을
한기가 찾아들면
면 내복을 꺼내 입고 외투를 껴입고
누군가가 창을 두드려도
못 들은 척 책 읽기에만 몰두하고 싶다
눈 오는 밤은 시골 교회 뒷담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만 돌아설까
망설일 때 작은 그림자로 나타나던
처음 닿던 입술이 인두불이던
소녀를 만나고 싶다
슬프지 않은 추억은 추억이 아니다
그때의 가슴이 손수건 같이 펄럭였다고
쓴다 한들 풋순 같은 그 가슴을 누가 탓하랴
눈의 살은 희고 눈의 빛은 부드럽다
눈 오는 밤에는 옛날의 책들
조루즈 상드니 버지니아 울프
샤롯 브론테니 알프렛 테니슨,
읽으면 금방 한숨이고 눈물인
김소월이니 백석이니 그런
이름을 A4용지 다섯 장에
덧없이 끄적거리고 싶다
펑펑 문풍지에까지
눈이 차오르면 갈 곳도 없이
자꾸만 목이 긴 양말만 갈아 신어보고
혼자서 뒤척거리며 쓸쓸함을
생밤처럼 깨물기도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눈 오는 밤은
티브이도 안 켜고 전화도 안 받고
그것이 꼭 태고의 말일 수밖에 없는 시를
새로 깎은 4B연필로 쓰고 싶다
눈을 목화송이에 비유한 최초의 사람의
눈보다 더 희고 깨끗한 마음을
하이얀 종이에 눈의 물을 찍어 쓰고 싶다
일생을 시를 써도 눈 오는 밤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를
마음이 부르는 대로 받아쓰고 싶다
이기철
♬ Chopin , Nocturne op. 9 no. 1 in B flat minor (Daniel Barembo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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