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장석남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에서
간신히, 아주 간신히,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었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죽을 힘 다해 노력해서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단속하게 되었다. 달아나려는 감정의 가닥들을
한 곳에 쑤셔 넣은 후, 도망가지 못하게 꿰매놓았다. 그래 봤자 거개가 헛수고였음을 젊은 날의
경험이 아니어도 잘 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봉합해놓은 부분이 부풀어 오르고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을 그래서 나 같은 범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나 보다. 시인은 단연코 인내의 챔피언이다. 앵두 한 알에 그리움을 담고
또 그 앵두를 만지작거리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 세월이 어떠했는지, 앵두의 색깔이 얼마나 붉을지
나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아니 누가 그 앵두를 맛이나 보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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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tasha Dance/Chris De Bur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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