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야생화

앵두

by 류.. 2014. 6. 7.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장석남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에서 

 

 

 

        간신히, 아주 간신히,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었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죽을 힘 다해 노력해서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단속하게 되었다. 달아나려는 감정의 가닥들을

        한 곳에 쑤셔 넣은 후, 도망가지 못하게 꿰매놓았다. 그래 봤자 거개가 헛수고였음을 젊은 날의

        경험이 아니어도 잘 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봉합해놓은 부분이 부풀어 오르고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을 그래서 나 같은 범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나 보다. 시인은 단연코 인내의 챔피언이다. 앵두 한 알에 그리움을 담고

        또 그 앵두를 만지작거리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 세월이 어떠했는지, 앵두의 색깔이 얼마나 붉을지

        나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아니 누가 그 앵두를 맛이나 보려 하겠는가?  

        .....

         

        ♬  Natasha Dance/Chris De Burgh 



         

'야생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절초  (0) 2015.09.04
살구  (0) 2015.01.23
능금  (0) 2013.09.16
능소화  (0) 2013.05.08
동강할미꽃  (0) 2013.03.2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