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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할 때 들고 나갈 책 고르기

by 류.. 2008. 10. 24.

 

데이트 할 때 들고 나갈 책 고르기

 그녀는 물끄러미 내가 무릎 위에 펼쳐놓은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날 내가 들고 나온 책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권태>였다.
사람들은 책 한 권을 들고 나갈 때도  많은 생각을 한다.  "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라고 대놓고 홍보하는 셈이니까.  데이트라
면 더할 것이다.  우선은 들고 다닐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하겠지.  철면피가 아니라면  <소녀경>이나 <아무도 몰랐던 성(性)의
비밀> 같은 책은 좀 곤란할 것이다.  고전은 고루해 보일 수 있으니 패스.  <돈키호테> 같은 책은 실제 내용은 전혀  고루하지
않으나 늘 세계명작전집 첫머리에 있으니 문제가 된다.

한편 너무 실용적인 책은 신비감을 주지 못한다. <협상의 기술> 같은 책을 데이트할 때 들고 나간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괜
한 경계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바둑의 정석>이나 <월간낚시> 같은 유도 대략 난감하고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는 아
무리  고전이라도 사람을 좀 어려 뵈게 만들고  약간 현실에서 동떨어진 몽상가처럼 보이게 한다.  영화잡지를 말아쥐고 다니
면 좀 난 체하는 사람 같고 시사주간지를 들고 다니면 아저씨 같다.

그런가 하면,  교과서에 실린 작가의 책도 문제.  그런 소설을 들고 다니며 젊은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란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제일 무난한 것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책인데,  문제는  상대가 퀴즈의 여왕이라는
것이다.  뭘 들고가도 결국 화제는 내가 들고 있는 책으로 이어질 것이다.  세상에 그토록 많은 책이 있건만 데이트할 때 들고
나가기 적당한 책은 별로 없다니. 옷은 많은데 입고 나갈 옷은 없다는 여자들의 한탄이 아마 이와 비슷할 것이다.



                                                                                                                                    김영하 장편소설 <퀴즈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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