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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행복'

by 류.. 2008. 5. 27.

 


허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는 최근에 개봉한 <행복>까지 포함해 총 4편. 주제는 모두 ‘사랑’이다.
허준호의 사랑은 늘 완성되지 못한다. 죽거나(8월의 크리스마스), 채이거나(남자의 입장에서-봄날은 간다), 불륜이거나(외출). 말하자면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다. 그의 모든 영화들은 만나고 헤어지는 계기들이 흐릿하다. 그리고 이 ‘흐릿함’은 전략이다. 일상의 언어, 논리의 셈법으로는 풀 수 없는 사랑의 불가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의 작전이다

 

 

 

사랑의 짧은 유효기간에 관한 잔인한, 그러나 정직한 보고서
완성되지 못한 사랑은 아프다. 완성됐다 한들 그 도달점이 기껏해야(!) 결혼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감독의 작전에 걸린 관객들은 가슴을 쥐어뜯는다. 성인 관객이라면 모두들 한번쯤은 열병 같은 사랑을 경험하지 않았겠는가. 허준호는, 그 경험의 공통분모를 영리하게 채집한 다음, 관객들의 감정선을 툭툭 건드린다. 이런 상황 너도 겪어봤지, 이럴 때 너도 이 딴 식으로 행동했지, 라면서, 질문을 던지듯이, 감독은 시퀀스들을 바느질한다. 쓸쓸한, 동시에 화사한 옛사랑의 기억이 모자이크처럼 꿰매어진 화면을 보면서, 관객은 지난 시절의 짧은 행복을 회고하게 된다. 이때 강조점은 ‘행복’이 아니라 ‘짧은’이다. 행복이란, 어쩌면 짧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감정일 수 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아야 하는, ‘기나긴’ 결혼생활이 행복했다고 호들갑 떠는 노인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영화 <행복>은 행복의 짧음에 관한 진술이다. 행복이 짧은 까닭은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기 때문이고, 결혼이라는 ‘통조림’으로 보호받지 못한 날것의 사랑일수록 유효기간은 짧을 수밖에 없다는, 잔인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직한 보고서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 <행복>도 그 시작은 창대했다. 중증 폐질환 환자인 은희(임수정)는 간경변에 걸려 요양원을 찾은 영수(황정민)에게 접근했고, 오래지 않아 둘은 연인이 된다. 은희의 헌신적인 사랑에 건강도 회복하고 새 삶을 찾아가게 된 영수는 “이제는 병 때문이 아니라, 너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넘치는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대략 네 계절이 순환하고 난 뒤, 건강을 되찾은 영수는, 은희와의 삶을 점점 지루해 한다. 때마침 서울에서 옛 애인과 친구가 찾아오고 마침내 영수는 은희를 떠난다. 은희는 한순간에 ‘행복’을 잃어버린다. 서울생활을 다시 시작한 영수 또한 은희와 살면서 되찾았던 건강, 거기서 비롯된 활력 따위를 몽땅 소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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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잃어버린 ‘명확한 이유’제시함으로써 도리어 설득력 잃어

비교적 간단한 <행복>의 이야기 구조는, 그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과 ‘정확히’ 정비례로 접목되어 있다. 불행 행복 불행이라는 내용의 흐름이 도시 시골 도시로 이동되는 공간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대응체계는 더 많이 발견된다. 병 회복 병, 도시애인 시골애인 도시애인, (물질적)풍요 소박 풍요, 술·담배 술·담배 끊음 술·담배, (자본주의적)직업 육체노동 직업…과 같은 변화들이 ‘불행 행복 불행’에 톱니처럼 맞물려 간다.

 

 

이처럼 기계적이다 싶을 정도로 ‘유물론적’인 <행복>의 이야기 구조는, 감독의 작전이라기보다 한계, 혹은 실수로 읽힌다. ‘사랑, 그 잔인한 행복’을 파헤치려면 사랑이 품고 있는 여러 속성을 좀 더 치열하게 물고늘어지는 게 합당할 터인데 <행복>은 옛 애인이나 환락의 도시 같은 ‘외생변수’를 개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전의 영화들이 고수했던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아니라 ‘명확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행복>은 허준호 감독의 특장점을 스스로 내쳐버린 영화가 된 셈이다.
특장점 내치기 그 자체가 잘못된 전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문제는 그 특장점을 내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꼴이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행복>은 허준호 감독의 전편들과 다르지 않게 사랑의 불가해성이라는 문제의식을 쥐고는 있다. 하지만 영수의 우유부단함이라든가 도시생활의 탐욕적 특질이 은희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설명을 착실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신비롭다.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는 사랑의 신비로움을 배우들의 수준  높은 연기와 잘 조직된 화면과 설득력 있는 에피소드들을 묶어 차분하게 제시했던 게 허준호 감독의 영화들이었다. <행복>은 그 영화들의 테두리 안쪽을 지향했음에도 도식적인 대칭구도로 대표되는 ‘이유’들로 인해 테두리를 벗어나 버렸다. 그래서인지 설득의 힘이 약하다.

영화가 남긴 가장 강력한 잔상은 은희(를 연기한 임수정)다. 처음 영수에게 손을 내민 그녀는 마지막에도 먼저 손을 내민다. 영수 같이 한심한 녀석을 끝까지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이해할 수 없음이 <행복>에서 이해되는 거의 유일한 ‘사랑’이다.

이정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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