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글

돈과 사랑

by 류.. 2007. 4. 2.

  

주말에 책상 정리를 하다가 책꽂이 뒤에 박혀 있는 작은 노트를 발견했다

작년 영작 시간에 학생들에게서 걷은 영어일기 중 수미 것을 잃어버려 돌려주지 못했는데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방 치우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나는 잠깐 수미의 일기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2005년 6월 3일의 일기를 대충 우리말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와 내 남자친구는 서로 정말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둘 다 너무 가난하다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영화관도 자주 가지만 우리는 돈이 없어 못 갈 때가 많다

남들이 롯데월드에 갈 때 우리는 노고산에 가고, 남들이 갈비집에 갈 때 우리는 분식집에 간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어머니께 돈을 갖다 드려야 한다. 어디선가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옆문으로 빠진다’는 말을 들었다. 가난이 싫어서 어떤 때는 그와 헤어질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 그리고 마지막에 수미는 괄호 속에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수미의 질문 밑에 나는 다음과 같은 답을 써 놓았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는가이지,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는가는 중요하지 않단다. 오직 돈 때문에 지금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먼 훗날 후회하게 될 거야.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마치 영원한 진리라는 듯,

굵고 힘 있는 필체로 내가 쓴 문장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것을 쓸 때만 해도 난 선생으로서

내 충고가 수미의 삶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안의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남의 인생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있군. 어떻게 돈 없이도 사랑만 있으면 행복하리라고 단언하는가?

수미는 네게 모든 것을 정직하게 다 털어놓았는데, 너도 지금 수미를 정직하게 대하고 있는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그저 선생 체면상 교과서적인 답을 써놓았을 뿐,

수미의 딜레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답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랑이냐, 돈이냐. 무슨 신파극 제목 같지만, 따지고 보면 사랑과 돈은 영원불멸의 인생 주제다.

선생으로서, 아니 인생 선배로서 수미에게 어떤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수미에게 자신 있게 말했듯이,

나는 정말 돈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나는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고, 그래서

돈에 초연하다. 아니, 내가 돈에 초연하다고 생각하기를 즐긴다. 그렇다고 무소유가 미덕이라고 생각

한 적은 없다. 어차피 한세상 살다 가는 건데 이왕이면 편하게 많은 것을 누리며 살다 가고 싶다.

태풍을 걱정해야 하는 초라한 집보다 전망 좋고 큰 아파트에서 살고 싶고, 작은 경차보다는 번쩍이는

큰 차가 좋고,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기보다는 우아한 호텔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게 낫다. 나는 절대로

햇살 한 줄기에 만족하는 디오게네스가 될 수 없고, 또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이 세상에서 돈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감옥에 가지 않고, 돈이 있어야

병을 고치고, 돈이 있어야 공부를 하고, 미국 속담에 ‘빈 자루는 똑바로 서지 못 한다’는 말이 있듯이,

돈이 있어야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자존심 내세우며 살 수 있다.

 

다시 수미를 생각한다. 돈에 살고 돈에 죽는 이 세상에서 앞문으로 들어오는 가난에 밀려 사랑이

옆문으로 새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수미의 일기장을 돌려주기 전에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한번 가정해 보자. 아주 돈이 많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 돈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 즉 돈 없는 사랑,

사랑 없는 돈 중에 어느 쪽을 택하겠니?” 물론 돈과 사랑, 둘 다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인생은 이것 아니면 저것, 선택일 뿐, 결코 ‘둘 다’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수미라면, 나는 그래도 사랑 없는

돈보다는 돈 없는 사랑 쪽을 택할 것 같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의 향기  (0) 2007.04.10
혼자라는 사실  (0) 2007.04.04
혼자 여행을 간다는 것  (0) 2007.03.31
기다리는 사람  (0) 2007.03.24
단 한번의 사랑이 있다면  (0) 2007.03.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