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1천 3백리 물길, 골지천변 寺乙基 마을
정선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오지(奧地)'를 그리게 되는데, 험준한 산세와 첩첩이 둘러싸인 산비탈 산간 가옥들은 도회지 사람들에 의해 정선을 오지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영동고속도로 새말 나들목을 빠져나와 평창을 지나면 일명 비행기재로 불리는 마전치(618m)가 나오는데, 정선의 관문이다. 산너머 산이란 말이 있듯이 정선 땅을 밟으려면 크고 작은 고갯길을 너댓번은 넘어야 한다. 이렇게 나마 쉬이 찾을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십수년. 고갯길 아래로 터널이 뚫리고 한나절 거리의 재너머 동네가 불과 몇 분대로 단축된 것이다.
하지만 정선 땅은 아직도 오지란 이름으로 구석구석 이 땅의 속살로 감춰져 있어 언제가도 정겨운 풍경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사는 게 힘들다고 느껴질 때 삶의 활기가 넘쳐흐르는 새벽시장을 찾아보란 말이 있다. 세상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탄 말고 정선의 오일장을 찾아보면 어떨까. 장마당 귀퉁이 좌판에 앉아 정선의 명물인 올챙이 국수에 막걸리라도 한 사발 들이키면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모습이 그렇게도 따스해 보일 것이다.
정선 민초들의 한(恨)을 노래한 정선아리랑
정선 아리랑의 노랫말을 들어보면 산과강, 고갯길, 마을, 골짜기 등 서민들의 질팍한 삶을 느낄 수 있는데, 정선읍내를 가로지르는 조양강 줄기를 따라 42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절로 정선아리랑의 한 구절을 떠올리는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바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넉넉함을 준다. 모두가 골이 깊고 흐르는 물처럼 흘러 온 긴 세월 정선 땅은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와 있었던 것이다.
조양강을 사이에 두고 협소한 골 안에는 산 사면의 비탈진 밭을 개간한 감자밭이 펼쳐진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렇게 정선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수백년 세월을 이어왔는데, 아우라지강변이 가까워 오면서 협소한 골은 너른 들판으로 바뀐다. 마을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식량을 얻을 수 있다하여 마을 지명이 여량(餘糧)이 되었다. 실제로 인근에는 논농사가 가능한 곳은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여량 만큼 넓은 농토를 가진 곳도 없다. 모두가 넉넉함으로 가득하고, 길손에게 물 한 사발 건네는 인심 또한 여전하다.송천(松川)과 골지천(骨只川)이 만나 어우러지는 아우라지 강변에 서면 왠지 모를 서러움에 서산으로 기우는 석양빛 보다 더한 뜨거움으로 가슴 가득 채워진다. 이루어지지 못한 애절한 사랑이야기 때문일까,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구성진 아라리 가락의 울림 때문일까. 아우라지 강변 한 귀퉁이에는 아우라지에 얽힌 사연을 비문에 적고 있다.
"이곳은 송천(松川)과 골지천(骨只川)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다. 여기서부터 남한강(南漢江) 1천리 물길을 따라 처음 뗏목이 출발한 곳으로 정선아리랑의 숱한 애환(哀歡)과 정한(情恨)을 간직한 유서(由緖) 깊은 곳이다. 또한 뗏목을 타고 떠나는 님과 헤어지던 곳이며 강을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님을 만나지 못하던 애절한 사연을 담아 불리워진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라는 정선아리랑의 "애정편"이 전해져 오는 곳이다"
-골지천 상류-
여량 아우라지에서는 송천(松川)과 골지천(骨只川)으로 나뉜다. 울울창창 적송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송천변에는 수백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하다. 상류는 정선선 꼬마열차의 종착역인 구절리를 지나 강릉시 왕산면으로 이어진다. 석회암 암반지대를 흐르며 말 그대로 뱀이 몸을 비튼것같은 형상의 사행천(蛇行川)인 골지천, 태백시 창죽동 대덕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긴 세월 씻기고 다듬은 암반들의 계곡미가 뛰어나다. 풍광 좋은 절벽과 백사장, 자갈밭 등이 펼쳐져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부러 찾아들곤 했던 곳으로 물길이 유난히 심하게 휘감아 도는 절벽 아래에는 왕바위소, 용소, 주룡소 등 깊이를 짐작키 어려운 커다란 소가 자리잡아 멋을 더하고 있다.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아낙들은 빨래를 한다. 해질 무렵 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들은 적당히 물 흐름이 유연한 곳을 찾아 등목을 한다. 그냥 떠 마셔도 좋을 만큼 투명한 물빛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찾는 이들이 늘고 이런 저런 이유의 공사들을 하면서 물빛이 예전 같지 않다. 옛 어른들은 '물은 제 골로 흐른다.'고 했다. 인위적으로 물의 흐름을 바꾸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제 자리를 찾아 흐른다는 얘기다.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모두에게 깊은 추억을 간직한 골지천은 이제 피서객이 주인이 되었다.
-구미정과 골지천-
구미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을기(寺乙基)마을
골지천의 제일 경은 구미정(九美亭)이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하는 뼝대(절벽)가 감싸 안고 거대한 암반을 따라 용트림하며 흐르는 구미정에는 아홉 가지로 경관이 다양함을 표현한 구미정18경이 적혀 있다. 유원지 주변정리가 끝나 주차장과 야영장 등의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구미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빼기에 오래 전에 절이 있었다는 사을기 마을이 있다. 10여가구 대부분이 감자농사가 주업으로 구미정의 요란함과 대비되는 고요함이 인상적인 마을이다. 구미정에서 바라보면 산비탈의 경사가 만만치 않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보이지만 골지천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를 건너 고갯길을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인 제법 넓은 둔덕이 나타난다. 감자 꽃이 한창 피어오른 둔덕은 아랫동네인 구미정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유원지가 다 그렇듯이 반듯반듯 규격화 된 구미정이지만 마을로 들어서면 쓰러질 듯 버티고 선 귀틀집과 흙과 돌로 쌓은 담장이며, 시뻘건 양철지붕이 강원도 산골마을 풍경 그대로이다. 지대가 높아 겨울이면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지난 겨울만해도 걸어다니기조차 힘들었다. 촌로의 굽은 허리만큼이나 고단한 삶이 엿보이지만 그래도 재너머 임계장을 보아 살던 지난 시절이 그립단다. 구미정 맞은편 절벽 가까이 달라붙은 오솔길이 임계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수풀이 무성해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다고 그 흔적까지 지울 수는 없나보다. 유심히 바닥을 살피니 뚜렷한 길이 나타난다. 사을기 마을에서 골지천의 S자 곡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 너럭바위를 지나 임계까지는 두어 시간이면 간다.
자연 속에서의 삶을 찾은 방성애 산장
사을기마을 한가운데에는 자신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건 '방성애 산장(033-563-6665)'이 있다. 시골이 좋아서 맑은 공기를 맘껏 마시고 싶어서 6년 전에 이 곳에 둥지를 틀었다는 방성애(50) 씨.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민박을 친다. 뒷산에서 나는 산나물로 밥상을 차리고 흙내음 풀풀 나는 구들방에 잠을 재운다. 50년 된 구옥을 개조해 살다 지난해 흙과 나무만을 사용해 집을 한 채 더 지었다. '사람의 욕심이야 끝이 없다지만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의 삶만은 꼭 이루고 싶었어요.' 오십줄에 접어들었지만 중년의 여유로움보다는 소녀의 풋풋함이 느껴진다. 언제 가도 좋은 곳, 정선 땅에는 이렇게 자신만의 삶을 위한 공간을 꾸민 이들이 많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생의 한가운데서 한순간 쉼표를 찍고 싶을 때, 정선 땅을 밟아보자.
사람과 자연의 어울림 속에서 가슴 가득 넉넉함을 채워 올수가 있을 것이다.
-방성애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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