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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유령같은 사랑

by 류.. 2006. 2. 8.

 

        유령 같은 사랑. 당신은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렇게 유령 같은 사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죽음 같은 사랑. 나는 사랑을 하였지만 그것은 나의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희미하게 내 주위를 떠돌고 있었을 뿐, 나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것을 지켜볼 수만 있었다. 당신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나는 사랑 속에 빠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한 걸음 혹은 그 이상을 떨어져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것은 마치 사랑이 아닌 것처럼 내 눈에 비쳐졌다. 나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마음으로 나의 사랑이 제멋대로 놀아나는 것을 보았다. 제발 그러지 말아라, 내가 아무리 빌어도 그것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생명으로 충만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얼마 못 가 힘을 다하고 사라지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심심한 일상으로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령 같은 나의 사랑은 그것조차 허락해주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밤이 되면, 나는 때때로 그것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제 끝을 내! 그러나 그것은 잔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끝을 낼 수는 없어. 처음부터 시작이 없었으니까.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눈빛 하나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그의 나이조차 몰랐다. 그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잘 먹는지, 집에서는 어떤 음악을 듣는지, 아니 듣지 않는지,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무슨 비디오를 빌리는지, 아니 빌리지 않는지, 그의 방은 지하인지 일층인지 아니면 이십층짜리 아파트의 꼭대기인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의 푸른 야구모자밖에 없었다. 나는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다. -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pp.197 - 200 영화 '2046' OST - Main Theme (with purcu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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