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낙조는 따뜻하다. 태양은 산산이 제 몸을 부숴 바다를 물들인다. 금빛을 이룬 바다는 텅 비어있는 가슴, 생채기 가득한 마음에도 온기를 가득 채워준다.
송구영신(送舊迎新). 김제 심포(사진 아래)개펄로 낙조를 보러 떠난다. 서해안엔 수없이 많은 낙조 명소가 있지만 심포의 낙조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끝나면 얼마 안가 마른 들판이 돼버릴 시한부 선고를 받은 바다이기 때문이다. 개펄이 만들어지는 데는 8,000년 정도가 필요하다고 하니, 8,000년 역사가 불과 십수년만에 사람들에 의해 뭍으로 바뀌는 셈이다.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바다이다보니 다른 곳을 제쳐두고 먼저 마음이 달려간다.
우리땅에서 가장 너른 김제평야.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인다는 곳. 8천6백여만평이나 되는 광활한 들판 서쪽 끝머리에 심포개펄이 있다.
아늑한 겨울 들판을 지나 바다로 이어지는 물목. 심포 포구는 스산하다. 겨울은 바다로 치면 추수기. 물길을 따라 바닷고기들이 밀고 들어오는 데다 개펄에선 싱싱한 해산물이 나오는 때이지만 고깃배들은 대부분 포구에 정박해 있다. 많은 어민들이 떠났고, 일손을 접었다.
지난 봄이었던가. 심포개펄을 찾았을 때 울화통을 터뜨렸던 어부가 생각났다. 30년 전 서울생활 접고 고향을 지키겠다고 바다 일을 해왔는데 이제 떠나야 한다고. 보상금 몇백만원만 손에 쥔 것으로 바다를 잃었다고. 이날 따라 한숨을 토해낼 만한 어부도 보이지 않았다. 낚시꾼들만 개펄에 들어와 한가롭게 낚시를 하고 있을 뿐. 그나마 낚시꾼이라도 없었다면 바다는 더욱 적막했을 것이다.
심포개펄은 동진강과 만경강이 물길을 대서 만들어졌다. 강물에 떠내려온 퇴적층이 마치 삼각주처럼 차츰차츰 쌓여 개펄이 됐다. 썰물 때는 무려 4㎞까지 물이 빠진다. 물 빠진 개펄은 광활하다. 북쪽으로는 아득하게 군산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변산반도가 튀어나와 있다. 그 사이에 아늑하게 들어있는 심포개펄은 김제평야 못지 않게 드넓다.
심포개펄은 백합어장으로 유명했다. 부안의 계화도와 함께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백합산지였다. 백합은 전복 다음으로 비싼 패류. 겨울철이 제철이다. 여름에는 1㎏당 8,000원 정도, 겨울철에는 1만5천원을 호가한다. 주민들은 백합을 생합이라고 한다. 생합을 ‘알루미늄 호일’에 싸서 구우면 껍데기 속에 맑은 ‘조개국물’이 고이는 데 별미다.
백합 외에도 물고기들이 많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은 물고기들의 산란처. 한 때는 이곳에서 꽃게, 대하, 도미, 봄대하, 오징어, 농어 등 수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잡혔다. 만경강과 동진강은 뱀장어들이 몰려오는 곳이다. 뱀장어 하나만으로도 꽤 돈을 벌었다는 데 물막이 공사가 시작된 뒤 점차 땅이 굳고 바닥이 높아져서 그 숫자도 줄고 있다고 한다.
심포는 한때는 돈을 건져내는 황금포구로 ‘돈머리’라고도 불렸다. 1980년대 후반 심포에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횟집타운으로 변했다. 전주권에서도 제법 북적됐던 포구. 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경기도 좋지 않고, 개펄도 죽어가고….
심포개펄 건너 반대편 군산의 옥구 일대는 도요새의 도래지. 마도요, 알락꼬리마도요, 청다리도요, 중부리도요, 뒷부리도요, 민물도요 등 10여종의 도요새 수만마리가 옥구를 거쳐 남하하는 곳인데…. 사람이 떠나면 새들도 떠날까.
심포포구에서 1.6㎞ 정도 가면 망해사(사진 위)가 있다. 개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망해사는 심포의 전망대 격이다. 망해사(望海寺)는 이름 그대로 해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서녘에서 가장 낙조를 조망하기 좋다는 고찰이었다. 산이라기보다 작은 언덕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한 해발 72m의 진봉산. 솔숲이 적당히 섞여있는 언덕길을 올라가면 망해사에 닿는다.
망해사 안내문에는 671년 신라 문무왕때 지어진 고찰이라고 적혀 있다. 642년 백제 의자왕때 부설거사가 세운 가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조선 선조 때의 이름난 선승 진묵대사가 수행했다는 절이지만 지금은 역사에 비해 초라하다. 하지만 전망은 뛰어나다. 망해사에 서면 건너편으로 북쪽의 군산이 들어온다. 그 사이에 개펄이 앉아있다.
심포개펄로 해가 진다. 햇살은 개펄에서 부서지면 유리파편처럼 반짝거리고, 물 속에 잠기면 금빛으로 변한다. 시시각각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낙조. 아마도 창조 이래 단 하루도 똑 같은 날이 없을 것이다. 구름이 갈라진 곳마다 다른 빛깔을 띠고 있는 ‘붉음’. 햇덩이가 바다와 몸을 섞으면 바다는 또 다른 붉은 색으로 물든다.
노을 바다 아래서 조각난 마음을 태워 본다. 불끈불끈 일어났던 뜻모를 노여움을 사르고, 술로서도 달랠 수 없는 기억도 바다에 떠내려 보낸다. 그리고 그 그늘진 가슴에 바다에서 건진 환한 빛 조각 하나를 담았다. 노루꼬리만큼 남은 계미년이여 잘 가시라. 밝아올 새해는 빛처럼 환한 날만 되시라.
▲여행길잡이
▶교통
서해안 고속도로를 탄다. 서김제IC에서 빠져나오자마자 3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만경읍 가는 길. 5㎞ 정도 달리면 읍내다. 왼쪽 702번 지방도를 타면 진봉면이다. 계속 달리면 망해사 표지판이 나온다. 망해사 가는 길에 심포항이 보인다. 서울역에서 김제역에 정차하는 호남선 열차는 오전 6시5분부터 3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역 앞에서 거전~심포행 버스를 타면 된다. 하루 28회 운행한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는 하루 12차례 왕복한다.
▶숙박
심포항에 사보이장(063-544-6790)과 심포장모텔(063-545-1662) 등 2개의 모텔이 있다. 금산사권에 비교적 숙소가 많은 편이다. 모악산유스호스텔(063-548-4402), 계룡마을(063-543-0701), 동원장(063-548-4300), 모악산장(063-548-4411) 등이 있다. 김제 시내에는 장급여관이 20여곳 있다. 귀빈장(063-544-2233), 덕수장(063-544-0149), 동아파크장(063-545-2288) 등이 20실 이상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먹거리
심포항에는 주로 횟집들이 몰려있다. 대양수산횟집(063-544-8516), 동경횟집(063-543-2929), 연서활어횟집(063-543-1900), 해변수족관(063-543-5634) 등이 있다. 백합 요리로는 탕과 죽이 있는 데 담백하다.
▶볼거리
김제는 농경문화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중 하나인 벽골제가 유명하다. 부량면에 있는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때 쌓았다. 사적 111호. 지금도 둑과 수문 등이 남아있다. 규모가 워낙 커서 조선시대에는 수리를 하는 데만 1만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벽골제 유물전시관(063-540-3225)에서 고대의 수리발달사, 벽골제 축조모형, 발굴현황 등을 볼 수 있다. 모악산 기슭의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에 창건된 고찰.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감금된 곳이다. 실제로 드라마 ‘태조 왕건’을 촬영하기도 했다.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은 겉보기에는 3층으로 돼있지만 내부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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