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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시나무

by 류.. 2005. 7. 2.


 

 

 

은사시나무, 나의 사유思惟

                                                            

이른 봄 마당에 은사시나무를 심었다

뿌리가 깊어지면서 이파리들은

은빛 바람을 몰고 왔다 바람불면
나는 은어 떼처럼 몸을 흔들면서
하늘로 비상했다

 

동터 올 때면 내 몸에 붉은 물이 들었다
한나절 나무그늘에 누워 있으면
무수한 사유思惟의 새들이

떼지어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가을 찬비 내리던 날 나는
신열에 몸을 떨고 서 있었다
화려한 사상思想의 잎들이
내 몸뚱이에서
비늘처럼 떨어져나갔다

 

그해 겨울
나는 마당 귀퉁이 은사시나무 곁에서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곤 했다
밤이면 나무가 추위에 떠는 소리가 들렸다
시린 강물소리도 먼 바람결에 실려왔다
이 계절 나무는 어떻게 나이테를 만들고 있을까

 

새벽이면 나는 발 시린 나무 곁에 서서
하늘로 치솟기만 했던 사유의 가지들이
성장을 멈추고
안으로 몸 허무는 소리를 들었다.

 

< 이영수 시집 "내 가슴속 홈리스" 한국문학도서관 2005> 중에서

 

 

 

은사시나무처럼

/길강호

은사시나무를 보면 알 수 있지
세상의 모든 나무가
바람에만 흔들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햇볕에 반짝이는
은사시나무의 잎들을 보면 알 수 있지
은사시나뭇잎의 나부낌은
줄기줄기 햇살에 부딪쳐서라는 것을,
흔들리듯 떨고 있는 환희라는 것을

은사시나무들의 거리에 가면 알 수 있지

햇살에 부딪쳐 빛나는
은사시나무처럼 살수는 없을까
봄 햇살을 받는다는 사소한 일상에도
잎들을 반짝이며 기뻐할 수 있는
은사시나무처럼 살수는 없을까

은사시나뭇잎들이
별빛보다 더 빛나는
그 곳에 가면
나는 언제나 부끄럽지
정말 은사시나무들처럼 살수는 없을까

 

 

 

 

 

 

 

햇볕은 싫습니다.
그대가 오는 길목을 오래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비에 젖을수록 오히려 생기 넘치는 은사시나무,
그 은사시나무의 푸르름으로 그대의 가슴에
한 점 나뭇잎으로 찍혀 있고 싶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대.
비 오는 날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오실 땐
햇볕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요.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비 오는 간이역,


그리고 젖은 기적소리.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는 싫습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려
차창 너머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는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은사시나무/
이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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