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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

by 류.. 2015. 10. 27.

작품 속 내 고향 ② 김주영 작가의 청송 진보장터 (대구일보 2014년 5월22일자)

 

밑바닥 인생길 위에서의 파란만장 / 글  권순진

 

 

 

완결판 '객주'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과 봉우리를 나란히 하며 한국문학을 대표해온 대하역사소설이 김주영의 ‘객주’다. 『객주』는 ‘천봉삼’이란 보부상이 표면상 주인공이긴 하지만 길바닥을 떠도는 모든 민초들이 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의 근력과 근성”이라는 확고한 사관에 기초하여 집필된 작품이 ‘객주’인 것이다. 김주영 작가는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미래의 일”이며 역사가 있으므로 미래를 내다볼 수 있고, 지금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근대사에서 피지배자인 백성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샅샅이 다룬 소설은 그 이전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길산’과 ‘객주’는 역사소설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때까지의 역사소설은 대개 궁중소설류였고, 역사는 정권을 손에 쥔 자들에 의해 전개된다는 의식을 가졌으나 ‘장길산’과 ‘객주’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도둑과 보부상 같은 천민의 삶을 다뤘다.

 

 

  ‘객주’는 19세기 말 조선시대 보부상들의 길 위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아낸 우리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이 지금껏 널리 읽히는 이유는 ‘약자 편에 선’ 작가의 소신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취재를 위한 엄청난 발품으로 노트 11권 분량의 우리말을 채집하여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 고유의 ‘입말’이 복구되어 ‘고유 언어의 보물창고’ 구실을 한 대목도 이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객주’는 조선시대 토속어와 서민언어가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어 박경리의 ‘토지 인물사전’처럼 작품낱말 사전이 ‘객주 재미나게 읽기’란 이름으로 별도의 책이 마련돼 있다. 이 작품의 도처에 널려 있는 고유어는 전통문화를 되살리면서 민중의 사고와 의사표현의 영역을 확대했다고 평론가 김종철은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객주’를 쓰기 위해 경제 역사서적 300여권을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객주를 읽으면 근대 상업자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훤히 알 수 있으며, 보부상들의 삶을 통해 150여 년 전의 시대상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점은 이 소설의 가장 진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속 주인공 천봉삼은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다. 작가는 천봉삼을 “내가 닮고 싶은 인물이며 우리 시대의 자본가들이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창조한 상인정신의 표본으로 세운 인물”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도 널리 읽혀졌다는 소문이 있다. 구자경 LG명예회장 등 많은 재벌 총수들이 객주를 읽고 공 사석에서 소설속의 상인정신을 언급하기도 했다. 객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여러 차례 완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고 보니 객주는 교도소 장기수들에게 특히 인기 높은 책으로도 알려져 있다. 실제 작가의 고향인 청송의 감호소 앞에서 만난 한 출소자로부터 “감옥에서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는 말을 들은 일도 있다고 했다. 객주의 저자에는 온갖 물건뿐만 아니라 사기꾼, 작부, 상인, 어수룩한 일꾼들이 어우러져 세상 밖 그립고도 다양한 삶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소설 속에 나오는 질박하고도 토속적인 성애 장면을 읽으며 감옥에서의 시름을 달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신경림 시인이 객주에 나오는 정사 장면을 두고 전혀 천하지 않다고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여기서 문득 세월호 승무원들이 만약 ‘객주’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같은 소설 한 권쯤 가슴으로 제대로 읽었다면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사들인 많은 정치 경제인들도 속속들이 탐독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시 한 번 일독을 권한다. 객주가 우리 문학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문학계에 '객주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 상업자본주의를 다룬 수많은 아류를 이끌었다. 초기 자본주의 생성과정에 대한 연구가 적었던 역사학계에 새로운 연구 동기를 제공했으며, 이에 객주를 인용한 역사 논문을 수없이 탄생시켰다. 문학이 역사를 선도한 경우는 지금껏 매우 드문 사례이며, 조선후기의 언어와 풍속을 발굴하고 당대의 풍속사를 유장한 서사형식으로 이만큼 완벽하게 재현한 작품은 없었다.

 

 

  김주영은 객주를 집필하면서 전국의 장터란 장터는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배낭에 녹음기와 카메라, 낡은 지도를 넣고 돌아다니느라 간첩으로 오인 받은 적도 여러 번이며 두 번이나 잡혀간 일도 있다. 그때 ‘길 위의 작가’라는 별칭도 얻었다. 대학노트를 싸들고 전국을 유랑하며 면 소재지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글을 썼다. 답사와 창작을 병행하며 일주일치 원고가 완성되면 신문사로 보낸 다음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를 반복하며 전국을 휘돌았다. 오늘날처럼 스마트폰이니 네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 작품은 본래 1979년부터 1984년까지 4년 9개월간 총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됐었고 1984년 9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작가는 더 이상 능력이 안 된다고 생각해 연재를 끝냈지만, 언젠가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9권 말미에 주인공 천봉산이 임오군란에 연루돼 사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무당 매월의 도움으로 도망하는 장면으로 끝났었는데, 주인공을 살려두었던 것이 10권을 쓸 수 있는 불씨가 됐다. 그 ‘언젠가는’이 30년 뒤 지난해 가을 ‘마무리’되어『객주』10권 완결판이 나왔다. 집필을 시작한 지 34년 만의 대단원이었다. 그를 다시 움직여 뜨거운 열망을 치솟게 한 것은 경북 울진군에 남아있는 옛 보부상 길이었다. 울진 십이령길 초입에 세워진 보부상의 송덕비가 호기심에 더욱 불을 지폈다.

 

 

 우연히 이중환의 ‘택리지’를 뒤적이다 울진 인근의 염전터와 소금장수에 대한 내용을 발견한 것이 계기였다. 마침 2009년 울진 흥부장에서 봉화의 춘양장으로 넘어가는 보부상 길이 예전 모양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걸 알고부터 가슴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즉시 짐을 싸 당시 상인들이 소금을 실어 나르는 길이었던 십이령 고개를 찾았다. 그곳은 울진의 해산물을 경북 내륙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보부상이 아니었으면 울진의 해산물과 봉화의 농산물이 거래될 수 없었던 것이다. 보부상은 짐을 진 채 울진에서 봉화까지 150리길을 3박4일간 걸어서 넘어갔다. 그 길 위에 서민들의 애환과 삶이 녹아있었다. 완결편인 10권은 소금 상단 일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9권에서 남쪽으로 도망친 천봉삼의 사연이 섞여 들어가는데, 여기서도 작가가 보여주려는 것은 결국 ‘밑바닥 인생’이었다. 하지만 10권에서는 그전까지와는 달리 정경유착의 형성과 배경, 관료와 상업세력 결탁, 비리 등 우리 자본주의의 어두운 일면도 다뤄 김주영 문학의 변화가 읽혀졌다. 그동안의 많은 공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 ‘객주’는 조선 후기의 혼란한 시대상을 온몸으로 겪어온 천봉삼이 파란만장 끝에 봉화의 생달마을에 정착하고 객주를 여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지독한 가난과 결핍의 땅 청송 진보

 

 

 김주영은 우리 시대의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입담과 풍물 묘사는 판소리 사설처럼 투박하고 걸쭉하다. 그의 화술과 언술은 듣고 읽는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게 한다. 그는 가난한 시절을 겪으면서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객지를 떠돌며 살아온 자신의 이력으로 밑바닥 사람들의 얘기밖에 쓸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소설을 쓰게 한 원동력은 가난과 결핍, 보잘 것 없는 이력,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전해진 아픔들”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스스로를 밑바닥 서민이라고 칭하며 단 한 번도 문단의 주류로 인식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가난을 극복해가는 의지가 몸에 배어있었고 그의 몸 세포에는 질긴 생명력이 늘 꿈틀거렸다. 그래서 김주영 문학의 힘을 내면의 순박함, 촌놈 근성, 서민 의식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 평한다.

 

 

 그는 어떤 동기로 소설가가 되었으며, 장돌뱅이 이야기인 ‘객주’를 대서사의 형식으로 집필할 마음을 먹었을까? 김주영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왜 이런 형편없는 시골에서 태어났을까 원망했는데 그게 자산임을 깨닫는데 50년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술지게미를 먹고 등교하고, 학비를 못 내서 매일 혼나던 시절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데 지금은 그 시골에서 자라지 않았으면 절대로 소설가가 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중학교까지 겨우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니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스스로 인생을 고민하게 되었다. ‘나에게도 장래가 많이 남아있는데 뭘 하면서 살아갈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뭔가? 수학도 못해. 그림도 못 그려. 잘하는 게 없지만, 글 쓰는 게 참 좋다. 그 일에는 내가 익숙해져 있다.’ 자신을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 글쓰기였다는 걸 그때 인지했던 것이다. 지난 객주 완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김주영은 일본 마쓰시타 전기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이야기를 꺼냈다. “마쓰시타 사장이 자신의 성공비결로 세 가지 ‘행운’을 꼽았는데 가난하게 태어난 것, 허약하게 태어난 것,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다보니 성공에 이를 수 있었다는 거죠. 저 역시 시골 출신으로 가난하게 자랐고, 병약한 데다,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객주’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죠.”

 

 

 김주영 문학의 뿌리를 거슬러 가보면 청송의 진보라는 마을에 닿는다. 진보는 그의 소설의 토대이자 토양이었다. 요즘도 5일장이 서는 '진보장' 바로 인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에게 가난한 시골 생활은 아주 재미없는 단편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 보는 것과 같았다. 갑갑한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단연 집 근처에서 오일마다 서는 장날이었다. 장날만 되면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서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고서 결석을 하곤 했다. 진실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러다보니 나중엔 장이 서는 날이면 진짜 배가 아팠다고 하였다. 장날만 되면 낯선 사람, 낯선 물건, 온갖 사투리, 쌈박질, 작부, 사기꾼까지 두루 구경하며 장거리를 배회하는 재미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그 낯선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보고 듣고 하는 습관이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었다. 김주영은 거기서 기른 호기심과 상상력이 훗날 ‘객주’를 쓰게 한 밑천이었다고 한다. 저자거리는 소년 김주영에게 바깥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장날 말고도 학교를 파하고 나면 대개 버스정류장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떠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자전적 성장소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의 도입부에는 고향집 묘사가 나온다. “마을에서 면사무소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들머리에 궁핍을 겪었던 시절의 집이 있었다.… 울바자 너머로는 언제나 먼지와 허섭스레기가 흩날리는 장터거리가 있고, 거기선 닷새마다 한 번씩 저자가 섰다. 무싯날에는 내왕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휑뎅그렁하기만 해서 동네의 개들이 몰려나와 한가롭게 흘레를 붙곤 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서는 날엔 꼭두새벽부터 노점상들과 장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해서 아침나절이 되면 그 넓은 장터가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꽉 들어찼다.” 1971년 서른셋의 나이에 ‘휴면기’란 작품을 들고 홀연 문단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안동역 근처에 있는 전매청 엽연초생산조합 사무실에서 10년 동안 단조로운 경리업무를 하며 지겨움과 권태를 술로 견뎌내야만 했었다. 생활에 어떤 변혁을 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습작을 했던 것이다. 작가가 되고서 어린 시절에 봤던 장터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타지방의 장터를 찾아가 보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장꾼의 원조에 보부상이란 큰 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김주영은 서울, 대구 같은 대처에서 태어난 것보다 청송 같은 산골에서 태어난 것이 결과적으론 인생에 보탬이 됐다고 술회한다. 어린 시절부터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려는 강력한 동기부여를 받았다는 점이 그렇단다. 1939년생 김주영은 청송군 진보면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대구농고 축산과에 진학하면서 처음 대처 땅을 밟았다. 김주영은 대구농고 3학년 때 교지에 ‘훈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한 바 있는데, 2학년 때 우연히 ‘현대문학’을 사보고서 당시 손창섭, 오영수 등의 소설을 읽었던 게 문학에의 꿈을 잉태한 계기였던 셈이다. 졸업 후 친지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게 된다. 그 또한 공부를 핑계 삼은 ‘탈출’이었다. 아무튼 그곳에서 박목월, 서정주, 안수길, 김동리, 최정희 등 기라성 같은 교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김동리 선생은 천상에 있는 분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키가 좀 작은 편인 김동리 선생이 어느 날 ‘키 높이 구두’를 신은 것을 본 다음 비로소 김동리 선생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인식했다고 한다. 김주영은 그분들한테서 글 쓰는 기교를 배웠다기보다 글 쓰는 정신을 배웠다고 한다. 젊음의 모든 열정을 문학에 쏟아도 괜찮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다른 학생들처럼 시 열 편을 써들고 박목월 시인을 찾아가 ‘읽어봐 달라’고 내민 일이 있다. 보름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직접 찾아가서 들은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운문에 소질이 없는 거 같아” 이 한 마디는 김주영에게 두고두고 수치였고 크나큰 상심이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기분이었다는데, 그런 뒤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 바로 자원입대해 버렸다. 훗날 작가가 된 이후 작품 경향의 변모를 가져다준 계기가 된 이병주 작가의 충고도 잊지 못한다. “이병주 선생이 저를 한번 불렀습니다. 강가에 앉아 음식을 같이 먹으며 이 양반이 ‘김군 말야, 문학작품이 우아해야 하네. 함부로 욕설 같은 걸 내뱉는 게 아니야’라고 충고하시더군요. 그런 말씀을 해주는 분이 주위에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어요. ‘아, 이래서는 안 되는구나, 문학이 오래오래 남아야 하는 것인데, 오래 살아남는 문학이 되려면 품격을 유지해야 한다. 욕설하고 세상일을 빈정거리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철학도 없는 소설을 써서는 안 된다.’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서 문장을 가다듬기 시작했죠. 조용하게 가라앉은,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뭔가 스며들 수 있는 얘기를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단편소설 ‘달밤’, 장편 ‘홍어’ ‘멸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쪽으로 발전해온 결정적 조언이었던 것이다.

 

 

 

잘 가요, 엄마

 

 

 김주영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완전히 외톨이였다. 누구도 놀아주지 않았고 그도 억지로 따라다니지 않았다. 외롭게 사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일밖에 없었다. 교과서를 베끼기도 하고, 뭔지 모르면서 계속 끼적거렸던 것이다. 그는 외로움의 배경에 어머니가 도사리고 있다고 여겼다. 그가 외로워진 원인에는 어머니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 어머니 덕에 김주영은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걸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론가 김화영은 김주영 문학에 신발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나오는 데 그의 떠돌이 의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의 떠돌이 생활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방에서는 자지 못하고, 찬바람 도는 거실에서만 잠이 온다는 김주영이다. 어릴 적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은 아버지요, 가장 미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가 지난 2012년 소설『잘 가요 엄마』로 돌아왔다. ‘잘가요 엄마’는 어머니에 대한,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부동생으로부터 엄마의 죽음을 전해 들으며 이 소설이 시작되는데 소설 집필하기 두 해 전 상황을 고스란히 옮겼다. 주인공이 아내와 자식들도 모르게 고향에 사흘 머물며 다른 동생과 함께 장례를 치르고 대화하고 옛일을 추억하는 이야기의 뼈대 역시 모친의 유지에 따라 주위에 부고도 생략한 채 조용히 장례를 치른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한다. 소설에서의 화자는 성공한 작가이고 그 어머니는 성공한 아들의 명성에 누가 될까, 자신의 존재마저 감추려 부심하는 사람이다. 그 구도 속에서 출생의 비밀, 씨 다른 형제와의 이야기 등이 고백적인 진술로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어린 시절 김주영을 먹이고 굶기고 할퀴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추억에 얽힌 이야기를 남김없이 만날 수 있다. ‘엄마’는 작가에게는 물론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 시대 모든 어머니들이 살아낸 모성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길고긴 산고를 겪고, 제 젖을 물리고, 제 살을 떼어주며 우리를 키워낸 어머니. 그 촌스럽고 어리석고 못난 이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이다. 미련하고 바보 같은 엄마의 이야기는 김주영의 단련된 손끝에서 더욱 미련하고 촌스럽게, 그래서 더욱 아프게 그려져 있다. 소설 속 에피소드들은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인 가족사였다. 작가 자신도 이 소설을 통해 평생 스스로를 가둬 놓은 ‘누추한 가족사’라는 감옥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을 썼다.

 

 

 누구나 털어놓고 공개하기를 주저하는, 부끄러운 가족사를 소설을 통해 까발림으로써 그는 과감하게 가슴속 족쇄를 풀고 감옥에서 탈출한 것이다. 안동 문화권의 사람들은 양반이라든가 벼슬 등 집안 이야기를 자랑삼아 얘기하지만 김주영 작가처럼 누추하고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을 꺼린다. 작가 자신도 ‘누더기 같은 가정사’를 어느 수위까지 까발리느냐에 대해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룻밤에 단편소설 한 편 정도를 단숨에 쓰던 사람이 900장밖에 안 되는 소설 한 편 쓰는데 무려 1년 반이 걸린 것은 그만큼 이 소설의 중요한 뼈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느냐, 고민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응어리를 풀어버림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로운 사고로 나머지 생을 살아갈 방법이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했다고 한다. 마흔이나 쉰 정도였다면 아마도 이런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란다. 드러나서 좋을 것 없는 가족사를 계속 숨기려 했을 것이고 적당히 허세도 부리고 출세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은 감추고 싶을 테고, 자기 스스로를 훼손시키는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칠십도 넘겨 산전수전 다 겪은 황혼이라면 참회하는 마음으로 가족사를 다 드러내는 일이 그리 불미스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언젠가 공지영 작가가 본의 아니게 가족관계가 커밍아웃이 된 이후 훨씬 자신을 이해하고 성원해 주는 팬이 늘어났다는 이야기가 문득 생각난다.

 

 

 작가에게 수치심을 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가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개가를 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울타리가 없는 누추한 집에 살았다는 부끄러움이 그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울타리가 없는 집에 누가 찾아와서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면 누추한 방 안이 가차 없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된다. 가구도 없이 사과 궤짝 하나 갖다 놓고 사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노출의 비애’라고 했다. 담이나 울타리가 있으면 바깥세상과 안 세상을 구분할 수 있는데 소년 김주영의 집은 그러지 못했다. 새아버지가 두렵고 싫어 자꾸만 밖으로 돌았지만 김주영은 세상을 원망하지도 세상에 앙심을 품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태평때기(댁)’로 불릴 정도로 낙천적인 성격의 어머니를 그대로 빼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오늘 당장 저녁 끼니가 떨어져도 걱정을 하는 법이 없었다. 정 끼니를 구하지 못하면 굶으면 되고 날이 밝아 나가서 일을 하면 두 식구 먹을 곡식 한 됫박 정도는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하태평이었다.

 

 

 김주영에게 엄마는 이렇게 기억된다. “골목마다 종갓집이 버티고 있는” 보수적 동네에서 아들이 배곯지 않게 하려고 재가를 결행한 어미. 품팔이로 연명하는 고된 생활에도 “있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품위를 지키려 안간힘 쓰는 아낙. 대처로 나간 큰 아들이 고향에 들를 날을 고대하며 고쟁이 주머니에 늘 짜장면 한 그릇 값을 넣어뒀던 어미. 남편이 선물한 가짜 악어가죽 핸드백에 한번 바르지도 않는 빨간색 립스틱을 죽을 때까지 넣고 다녔던 한 여자. 장남이 사회 명사가 된 뒤 그녀는 행여 아들에게 누가 될까봐 ‘장한 어머니상’ 수상을 마다하고 죽음을 앞두고는 장례 절차 일체를 무시하고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긴 노파. 평생 어머니 곁에 살아온 이부동생이 질투와 서운함에 사무칠 만큼 어머니는 첫째인 김주영을 편애했다. 그 애틋한 사랑의 풍경들을 소설 속에서 회한으로 하나씩 떠올린다.

 

 

 김주영 작가의 어머니는 향년 94세로 6년 전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가난하게 험하게 사신 어머니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평생 기름진 것을 드시지 못 하신데다 한평생 먹고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의 고생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믿는 듯했다. 또 낙천적인 성격으로 남의 일에 절대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작가 자신도 그런 모든 점을 쏙 빼닮았다고 한다. 그렇게 ‘그리워하면서도 저주하고 멀리하려고 애를 쓰다가 다시 그리워지던’ 어머니였던 것이다. 정돈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게 만든 근본원인을 아버지가 제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컸다. 아버지 이야기는 꺼내는 것 자체를 꺼려했다. 아버지는 자식 교육에도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학비를 대주는 일도 등한히 했다. 자식의 인간 됨됨이를 만들어주는 데도 기여한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런 아버지조차도 나이 40을 넘기면서 그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김주영은 찌그러진 결손가정에서 자라는 처지를 당시엔 불행이라 여겼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환경이 자신을 조숙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식이었다. 가끔 고향 분들로부터 ‘주영이 너는 깡패가 됐어야 맞는데, 어떻게 글을 쓰는지 몰라’ 하는 말을 듣곤 하는데, 그는 사람이 환경보다 천성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김주영은 소설 '잘 가요 엄마'를 4개월 동안 인터넷을 통해 먼저 연재했다. 1회 분을 읽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글에 어떤 날은 600~700개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그의 글에 공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선생님이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좋은 분은 아니셨나 봐요’ 등의 따끔한 말도 있다. ‘객주’를 모르는 젊은이들 가운데는 이름과 소설의 제목만으로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한 이도 있었다. “아우와 함께 ‘한줌의 먼지’가 된 어머니를 뿌린 곳은 내 유년의 슬픈 추억이 담긴 장소. 어릴 적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려가면서, 줄곧 뻣뻣하게 어머니를 대해온 ‘나’도 자꾸만 마음이 무너져온다.” 소설의 한 대목이다. 소설의 맨 나중 <작가의 말>에서 김주영은 “철부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생애에서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 외에 내가 고향을 떠나 터득했다고 자부했었던 사랑, 맹세, 배려, 겸손과 같은 눈부신 형용과 고결한 수사 들은 속임수와 허물을 은폐하기 위한 허세에 불과하였다. 이 소설은 그처럼 진부했었던 어머니에 대한 섬세한 기록이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세속적 성공도, 생계와 전쟁을 벌이며 쌓아 올린 작은 세간살이도, 예술인지 기술인지 집착인지 모른 채 집요하게 추구해온 예술의 세계마저 한갓 부질없는 먼지로 날려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어린 시절 미워하며 수치스러워 했던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만이 자리잡고 있다. 그 나머지 모든 풍경은 그저 무념무상하게 스쳐지나가는 장면에 불과하다. 작가는 말한다. “잘가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난 당신뿐이 없었어요. 나는 당신의 분신이에요. 잘가요 엄마. 사랑해요.”라고.

 

 

 냉수 말고는 배불리 먹어본 일이 없을 정도의 궁핍, 가난, 작가는 평생 그런 어머니를 부끄러이 여기고 증오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어머니는 작가가 글을 쓰는데 꼭 필요한 자양분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미당 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를 키운 건 뭐랄까 분노와 술뿐이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문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억장을 무너뜨리는 이름이 아닌가. 각자 사정은 다르겠지만 엄마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애잔한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애잔한 본능을 위한 책이다. ‘잘 가요 엄마’는 일흔셋 노년에 접어든 작가 김주영이 작가인생 42년 만에 처음 부르는 사모곡이자 참회록이며 그 내밀한 고백이었다. 물론 소설적 구성을 위해 약간의 허구가 가미되었겠지만 작가는 우리에게 어머니라는 화두를 던져주면서 허구가 아닌 순도 높은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작가는 어머니에 관한 내용은 완전히 사실이며 그밖에 다른 약간의 허구조차도 사실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책에 쓴 대로 어머니가 김주영 작가에게 남긴 유산은 악어비닐가죽 핸드백과 립스틱뿐이었다. 작가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그 어머니는 자신에게 정말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흔이 돼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다. 작가 자신이 지금의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그루터기를 어머니가 제공해주었다는 걸 이 소설을 쓰면서 느꼈다고 한다. 김주영은 “어머니 살아계실 때 어머니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멀리하고 살았다”며 “맏아들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고 실토한다. 어머니의 재가로 15살에 집을 나와 자수성가하기까지 고향과 어머니를 등지고 평생을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어머니가 쓰던 싸구려 비닐가방 속에서 한 번도 쓰지 않은 립스틱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푹 떨군다. 어머니와는 그것으로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쓰고 난 뒤에 정말 후련했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이 하나 생긴 기분이란다. 그는 이것으로 어머니에 관한 소설을 더는 안 쓸 것이라고 한다.

 

 

 김주영 작가는 우연히 사주를 보았는데 평생 움직여야 살 수 있다고 하더란다. 또 돈이 들어옴과 동시에 나간다면서 자기에겐 돈이 고여 있을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역마살이 낀 것은 이골이 나있는 처지고 평생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도 그의 팔자였다. “자꾸 움직여야 웃을 일이 많이 생기고, 젊은 사람,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낯선 사람 만나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아요. 워낙 많이 돌아다녀서.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두렵지 않아요.” 그리고 젊고 혈기왕성했던 시절 많은 신문연재소설을 쓰면서 돈푼깨나 만졌으나 그 돈을 집에다 가져다준 적이 별로 없었다. 전부 가난한 문인들에게 밥 사주고, 술값 내는 데에 썼던 것이다. 내 것이라는 인식이 희박했는데, 딱 두 가지 ‘내 것’이 있다면 그건 ‘우산’과 ‘가방’이란다. 그동안 사들인 가방과 우산이 숱하게 많다며 “지나가다 눈에 띄는 가방과 우산은 대번 사버립니다. 집에 가져가면 면박 듣기 때문에 못 가져가고 사무실 곳곳에 처박아 놔요. 50여 개 되는 우산은 다 나눠주고, 가방도 많이 나눠줬어요.”라고 한다. 그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책가방 없이 늘 보자기에 책을 싸서 다녔던 궁핍한 추억과 비가 많이 와도 자기 우산이 없으므로 도리 없이 비를 쫄딱 맞고 다녔던 쓰라린 기억 때문에 포원이 진 ‘쇼핑’이었고 ‘홀릭’이었으며, 일종의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였을 것이다.

 

 

객주문학관 개관을 앞두고

 

 김주영 작가의 이력에는 ‘특이사항’도 있다. 물론 이력서에 반듯하게 내놓을 성질의 것은 아니다. 청송군 진보면 진성중학교에서 1년 동안 임시 국어교사를 한 경험도 그렇고 방학 때면 고향으로 내려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학력’도 그렇다. 훗날 그 서당 훈장 어른이 김주영 작가의 장인이 된 인연도 각별하다. 아내 ‘김진득’은 초등학교 동기생이지만 김 여사가 한 살 위다. “어려서부터 서로 빤하게 알았죠. 장인어른이 한학을 아주 깊이 하셨어요. 마을 사람들에게서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서당을 짓고 돈을 받지 않고 가르쳤죠. 방학 때 가서 한문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천자문을 주시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배우고 반납한 헌 책이라 너덜너덜했어요. 소학까지 읽었습니다. 제가 결손가정에서 자라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고, 좋은 학교 다니는 놈도 아니고, 빌빌거리는데 아마 가능성을 보고 딸을 주신 것 같아요. 장인이 먼저 제안했어요. 그분이 한학을 하셔서 사주를 볼 줄 아셨든지 안 그러면….” 그리고 180cm의 훤칠한 키에 인물이 준수하여 오래전 칠성사이다 광고 모델을 한 빵빵한 경력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국민과의 대화’ 사회를 세 차례나 맡은 바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이 옥중에서 ‘객주’를 읽은 게 인연이 닿았던 것이다. 그 연이 이어져서인지 뒷날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까지 맡았다. 덕분에 고향 사람들로부터 “글마, 출세했네” 라는 단순한 찬사를 연속적으로 들었다. 3년 전엔 ‘로드다큐 강’을 진행하면서 방송인으로 불리기도 했고 여행가란 직업도 얻었다. 그 무렵 ‘길 위의 작가’란 별명과 함께 낙동강 칠백 리 시발점인 상주를 배경으로 소설을 쓸 계획을 전해들은 경상북도 상주시로부터 상주시 명예홍보대사에 위촉되기도 했다.

 

 

 작가 김주영은 다시 태어나도 글을 쓸 것이라고 한다. 소설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상관없이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쓸 것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이야기. 의지와 상관없이 억압받는 사람들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근력은 젊은이보다 딸리지만, 지금도 소설을 써내고 앞으로도 계획이 있다는 것에 스스로 만족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죽는 날까지 내 손에서 글 쓰는 것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는 데에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다만 술이 좀 심한 편이라 그것만 좀 자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잘 안 된다고 한다. 그 외에는 다른 걱정은 없단다. 앞으로 적어도 네 권 이상의 소설은 써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었다. ‘객주’와 ‘엄마’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어낸 김주영이 앞으로 계획인 '죽을 때까지 글 쓰는 것'을 실천해 나갈 모습이 사뭇 기대된다.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탁월하게 재현해내는 우리 시대의 거장 김주영에 대한 문단의 찬사는 끊이지 않는다. 수많은 문학인들이 인정했듯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입담은 작품 배경만큼이나 유장하다. ‘걸쭉한 입담과 해박한 풍물묘사’가 돋보이는 장편 역사소설에서부터, ‘빛나는 감수성으로 눈이 시릴 정도의 박꽃 같은 순백한 사랑을 순정미학의 진수로 그려냈다’는『홍어』와 같은 중편, 그리고 ‘경쾌한 속도감, 재치의 반전으로 소설적 재미를 가속화 시키는’ 단편들에 이르기까지 소설가 김주영의 문학적 폭은 아주 넓다. 특히 ‘객주’를 완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김주영의 치열할 작가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객주를 쓰는 동안 한 개의 어휘를 찾으려고 이희승 국어사전을 맨 앞에서 끝까지 밤새 뒤진 적이 수십 번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와 한평생 어울려 지낸 소설가 이문구는 김주영이 소설을 쓰기 위해 깨알같이 메모해둔 노트를 보고 ‘이것은 그의 피다.피를 흘리는 김주영의 모세혈관’이라고 했다. 작가의 치열함과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객주 완간에 즈음하여 국민적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작가의 고향인 경북 청송에는 2015년 완공을 목표로 7,500평 규모의 ‘객주 문학마을’이 조성중이고 ‘객주’ 관련 자료가 전시될 ‘객주 문학관’은 지난 3월 준공되어 오는 6월 10일 정식 개관을 앞두고 있다. 폐교된 진보제일고 건물을 리모델링한 객주문학관은 연면적 4,640㎡(대지 24,771㎡)의 3층짜리 건물로 총 사업비 73억원(국비 36.5, 도비 10.95, 군비25.55)을 투입하여 2012년 12월 착공하여 15개월 만에 완공됐다. 김주영 작가의 문학 네트워크를 확대할 수 있는 전시⋅체험시설로 조성되었고 저술공간, 전시공간, 교육공간, 체험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시설로는 소설 객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객주전시관을 비롯하여 작가실, 기획전시실, 소설도서관, 체험숙박실, 카페, 창작관 등을 두루 갖추었다. 체험숙박실은 단체객들을 받을 준비가 이미 완비되어 있었다. 또 김주영 작가의 업무공간이 마련되어있는데 지금도 한 달에 열흘은 이곳으로 내려와 머물면서 고향사람들과 어울리고 문학관 운영과 문학마을 조성에 ‘훈수’도 둔다고 들었다. 아마 ‘엄마’를 잘 보내드린 뒤의 고향과의 화해일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작가의 옛집이 있는 청송 진보시장 인근에 옛 장터가 재현되며, 신기동 느티나무를 기점으로 고현지까지 15.6km거리의 ‘김주영 객주길’도 닦아놓았다. 청송군 관계자는 “객주문학관 준공과 함께 객주문학마을을 잇는 객주문학길이 2015년 완공되면 문학적, 역사적 의미가 확장하여 ‘객주’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주민, 관광객들의 관심은 물론 주왕산, 주산지 등과 함께 청송군의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개관을 앞두고 마지막 집기 등의 점검으로 분주한 객주문학관은 이미 시설을 개방 운영 중이었다. 전시물이 비교적 잘 정돈된 문학관에는 정말 ‘깨알’사이즈의 글씨로 빼곡한 작가노트도 보였다. 객주의 시대배경인 조선후기 보부상들의 사발통문, 멍석말이 등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물도 여럿 눈에 띄었다. 장터와 장꾼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관심으로 김주영은 저울추를 모으는 이색 취미를 갖고 있는데, 수집된 재래식 저울추도 다량 전시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문학과 여행의 행복한 만남’이란 새로운 트렌드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가는 듯 했다. 이 모든 것이 착착 진행이 된다면 경상북도의 ‘살아있는 문화관광 상품’ 하나가 새롭게 탄생될 것이다. 효용성 측면에서는 전남 벌교의 조정래 문학관을 능가하리란 예측도 가능하다. 다만 명실공한 성공을 위해서는 관련 지자체와 언론매체, 출판사와 문학단체 등의 유기적인 협조와 관심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김주영 작가는 앞으로 소설 세 편 정도는 더 쓰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여행에 할애할 작정이라고 한다.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나서는 '길 위의 작가'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을 각오라 했다. 오직 글쓰기만 목숨 걸고 사랑한 이 시대의 대표적 작가와 함께 하는 문학테마기행이 내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땡기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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